얼마 전 시가매거진 2580에서 ‘아빠의 전쟁’이란 제목의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용은 ‘아빠의 전쟁’이란 제목과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의 전쟁’이 맞는 것 같았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재혼 가정의 경우 주민등록상으로는 가족임을 의미하는 ‘자’나 ‘녀’로 표기되지 않고 ‘동거인’으로 표기되어 사회적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재혼을 하여 다둥이가족이 되어도 전기요금 할인 신청을 할 수가 없다. 혼인증명서로 자녀가 되었음을 증명하여도 공공기관에서 요구하는 서류는 가족관계증명서(주민등록등본)이고, 그 서류는 공문서인 이상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것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법상은 가족이나 요구 서류상 가족이 아닌 이상 혜택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업무 매뉴얼이 그렇게 되어 있단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요구하여 제출하였는데, 서류에 ‘동거인’으로 표기되는 바람에 사생활이 노출되고 상처를 받았으며, 아이들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례와 SH공사에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을 할 경우 ‘개인정보수집 및 제3자 동의서’에 모든 가족이 서명을 해야만 하는데, 이혼한 부모가 연락도 두절되면 서명을 받을 길이 없어 서류는 접수되지 않으므로 임대아파트 입주는 포기해야 한다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행정자치부는 혈연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동거인’으로 되어 있어도 다른 서류로 증명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하고, 다른 기관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제도적 모순이나 피해자가 없도록 행정절차를 정비하지 않은 것으로서 국민의 피해가 우려되는 사안이었다.

이런 부조리는 장애인의 일상생활에서는 너무나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A씨는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고자 인감증명을 발급받고자 했다. 그런데 동사무소 직원이 A씨에게 장애등급을 물어보았다. 지적장애1급이라고 하자, ‘인감’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대답을 하지 못하자, 신청서에 주소를 직접 써야 한다고 했다. 같이 동행한 그의 어머니가 대신 작성하려 하자 인감발급은 불가능하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임대아파트는 지적장애나 뇌병변장애3급 이상에게 2순위 특별분양을 한다고 공고문에는 나와 있으나, 지적장애인은 인감증명을 발급받을 수 없으니 이는 허위광고이거나 담당공무원이 지적장애에 대해 차별을 한 것이다.

지적장애인이 성인이 되면 성년후견인이 지정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 동행하였다 하더라도 요즘 세상에 가족들도 믿을 수 없으므로 인감증명을 발급할 수 없단다. A씨 어머니는 도대체 지적장애 부모들이 얼마나 자식을 이용해 먹었으면 이런 일이 다 있냐고 하소연하였다.

성년후견제는 부모가 없는 경우 친족이나 검사, 구청장 등이 가정법원에 신청할 수 있으나, 굳이 성년후견이 필요 없이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는 신청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리고 과거 민법에서의 금치산자나 현재의 성년후견제도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권리를 부정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임대아파트 입주를 신청할 경우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조성도록 하는 것이므로 불이익을 줄 것이라 추정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지적장애인은 인감증명이 들어가는 어떠한 경제행위도 할 수가 없다. 정부가 만든 성년후견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강제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재산을 만들기 위해 구입하거나 입주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차별이다.

더구나 장애인에게 혜택을 주겠다고 하면서 신청서류조차 준비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부조리가 분명하다. 바로 지적장애인을 스스로는 도저히 살지 못하도록 견제력을 죽이는 살처분이다.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아직 말도 못하는 재벌 3세 유아는 재산이 수백억대를 가진 아이도 있다는데, 이 아이들도 인감증명 발급에 지능수준이 조건이라면 인감증명을 발급함에 있어 판단력과 인지력을 검사하여 이들에게도 발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장애인에게만 능력을 행정공무원이 주관적이고 사적으로 직접 판단하는 것인가.

우리는 중학교 시절 든사람, 난사람, 된사람에 대해 배운 바가 있다. 요즘은 돈사람과 못(된)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의 사람 분류 기준이 금수저냐 흙수저냐이다. 금수저는 선천성 금수저와 후천성 금수저로 구분되며 이들은 모두 갑질을 해야 하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든 흙수저로서 마치 그리스·로마 시대에 장애인이면 귀족이라도 강에 버려야 하는 시대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금수저는 특권층을 의미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가족이나 직업군의 권력을 의미한다. 외줄타기에 비유하여 금수저는 안전장치가 완벽하며 줄에서 떨어져도 얼마든지 다시 시도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흙수저는 안전장치가 전혀 없으며 줄에서 떨어지면 끝이라는 말로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행자부는 ‘인감증명법 시행령 및 본인 서명 사실 확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하여 법원이 한정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판결한 경우를 제외하고 정신적 제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피한정후견인이 스스로 인감증명서와 서명확인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발표까지 하였으니 성년후견인이 있더라도 스스로 인감증명을 받을 수 있고, 성년후견인이 없어도 인감증명을 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행정 일선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행자부가 공무원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국민들이 피해와 고통을 받는다면 공무원만의 잘못이 아니라 행자부의 책임도 크다. 공무원이 안 된다고 하면, 국민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고, 이를 항의하면 업무방해로 고발한다고까지 한다. 정말 대한민국 공무원은 무섭고 무성의하며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갑다.

B씨는 큰아버지가 많은 빚을 지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 분의 딸은 상속포기를 하였다. 그러자 지적장애1급인 B씨에게 빚을 갚으라는 소장이 날아왔다. B씨는 어머니와 함께 상속포기를 하기 위해 인감증명 발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동사무소는 지적장애라 인감증명 발급이 안 된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면 그 빚은 평생 지고 독촉을 받으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공무원이 대신 내어 주려나?

성년후견인이 마음대로 해도 되도록 법은 보장을 하고, 장애인은 늘 사기를 당할 것이라 여겨 아예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다면 장애인들은 말할 것이다. 사기를 당해도 내가 당할 것이니 정부는 간섭을 말라고.

물론 장애인을 악용해서 명의를 도용하여 금융 사고를 쳐서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아예 재산을 가질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밥을 먹다가 체할 수도 있으니 장애인들은 밥을 먹지 말라고 밥그릇을 빼앗아서 비장애인들끼리 장애인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비정한 사회다.

글을 모르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비문해자와 사회성이나 소통력 시험제도를 만들어 점수별 신분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장애인만 서럽지 않은 방법이 될 것이다.

C씨는 어느 장애인단체에서 지적 장애인 당사자로서 사단법인의 이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등기를 하려고 하니 인감증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동사무소는 인감발급을 거부했다. 유엔에서는 지적장애인이 인권위원으로 선정도 되는데, 국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 활동도 하지 못한다.

국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을 교육할 의무가 있으며, 공무원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재판을 통해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직접 피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상처를 받을 대로 받게 하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교육을 몇 시간 받으라는 권고만 받을 뿐이다.

지적장애인이 성인이 되어 각종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려고 하여도 서명이 필요하거나 인감증명이 필요한 신청절차는 통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지적장애인에게 어마어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선심성 약속을 하고, 신청 절차에 인감증명만 요구하면 예산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애인이라 무시하지 말고 국민 무서운 것 알아야 하며, 국민 우매하다 말하지 말고 국가가 인식개선 제대로 했으면 한다.

민법에서 5년 전에 사라진 금치산자가 인감증명법에는 버젓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행자부의 권력이 대단한하다고 해야 하는지, 게으르다고 해야 하는지, 법원에서는 금치산자를 판결조차 하지 않는데, 행자부는 지적장애1급이면 금치산자라 초법적으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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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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