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피어난다. 추위 속에 잿빛으로 바짝 말라 죽어가던 나뭇가지에서 하얗고 보드란 벚꽃이 온종일 도토도독 쉴 새 없이 터져나오고, 퍼석하고 거뭇하게 침묵하던 흙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기어코 낮은 키를 바짝 세우며 일어선다. 제비꽃, 애기똥풀, 개불알풀꽃, 별꽃, 골목 담장 아래마다 작고 낮은 꽃들이 겁 없이 툭툭 피어난다.

마른 흙이라도 진득하니 모인 곳에 났으면 좋으련만, 회색으로 깡마른 콘크리트 담장 틈 먼지 사이에 태어나 어찌 버티려나 안쓰러운 꽃들도 있다. 어떤 꽃은 날 때부터 기름진 거름과 예쁜 돌로 장식된 온실화분에서 자라나 찬바람 한 번 맞지 못하고 안전하지만 무료하게 갇힌 생을 사는가 하면, 어떤 꽃은 어디에 머물지 몰라 그저 떠돌다 아스팔트 옆 시멘트 보도 사이에 내려앉아 시커먼 자동차 바퀴에 짧은 생을 짓밟혀 버리기도 한다. 모두 꽃이 원하던 삶은 아닐 게다.

시멘트 틈 사이에 핀 민들레. ⓒ김석주

꽃은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넓고 기름진 땅을 원했으리라. 주변에 다양한 향기와 빛깔과 소리로 어우러질 친구들이 있다면 더 좋았으리라. 맑은 날 큰 나무 그늘에 가리지 않고 태양빛을 그대로 받을 수만 있다면, 가끔 먹구름이 끼고, 세 찬 바람이 부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으리라. 어차피 구름과 바람이 있어야 비가 내리고, 그 빗물을 먹고 내 몸을 적시는 것이 생에 최고의 낙이므로 그 정도 수고는 필연적인 것임을 시간 속에서 배워갔으리라.

그리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 빛이 바래고 시드는 가을, 땅 속으로 사라져야하는 겨울에 이르러 죽음을 알았으리라.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생이 한 치 미련 없이 흙으로 공기로 기꺼이 사라져야만 새 씨앗들이 제 짝을 만나고, 스스로 찾은 터전에 안착하여 또 하나의 신비로운 생을 살아갈 것임을 깨달았으리라.

죽음.

장애인 가족들에게 죽음은 낯선 단어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신체와 염색체의 이상으로 장애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 두세 살이 지나서야 발달의 늦음을 염려하다가 뒤늦게 병원에서 장애진단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그 때 부모가 떠올리는 미래는 암 이상의 ‘불치의 병’ 곧, ‘시한부 죽음’과 같은 절망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 과거를 되짚으며 자책해보지만, ‘내가 남들보다 잘못한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라는 억울함으로 비명을 삼키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느 질환자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 병원 저 병원, 혹은 여러 치료실을 전전하며 많은 돈을 들여 완치에 집착하게 된다. 마치 전쟁터의 투사와 같은 무장을 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남은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아이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다그치거나 단절시켜버리는 희생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의 성장은 더디고, 거대한 학교와 사회의 벽에 부딪히며 상처투성이로 좌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제야 더 깊고 긴 고뇌가 시작된다. ‘아이는 평생 동안 장애를 안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는 살 수 있을까, 과연 죽음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고민을 몇 년 동안 하는 가족도 있고, 몇 십 년 동안 혹은 평생 동안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무리지어 피어난 길가 제비꽃. ⓒ김석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그것을 ‘부모가 어떻게 죽어야 할까?’ 라는 질문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간혹 온실에서 화분을 키우듯이, 자신의 재력과 능력에 의존시켜 평생 동안 장애자녀를 개인의 돈과 힘으로 보호하며 살도록 구축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들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비싼 개인교사를 두어 종일 동행하게 하며, 최고급의 주치의와 치료실 그리고 교육환경을 선택한다. 대학도 취업도 인맥으로 안전히 보호시키는 평생설계에 안도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서는 알 수 없다. 부모가 죽고 나면 그 자녀는 누가 보호하게 될까? 사회다. 야생의 정글 같은 사회에 뒤늦게 나온 화초는 단 하룻밤의 찬 기운에도 얼어붙어 버린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내어놓지만, 그릇된 사회를 그대로 받아들여 가정에서까지 강요한다. “너의 문제행동을 뜯어고쳐서 사회에 맞게 만들어야 해. 너는 글자를 알아야 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말해야 하고, 흔들거리는 상동행동을 그치고 똑바로 걸어야 해!” 그리고, 말로 해도 안되고 매를 들어도 안된다면서 자신의 수고를 정당화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끝까지 해보자.’ 라는 신념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부모가 그들의 이전 부모와 사회에서 강요받은 지위와 체면, 성공과 집념 등은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 장애자녀의 것이 아니다. 민들레는 30cm 이상 크지 못하며, 벚꽃잎은 아무리 붉어도 빨간색이 되지 못한다.

벚나무 숲속의 밤. ⓒ김석주

오히려 자신의 부족과 약함을 알고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부모는 장애자녀와 더 가까운 삶을 이루며 산다. 자신이 가난을 경험했기에 장애자녀의 미래에 경제적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으며, 자신이 소외당한 아픔이 있기에 외모와 지능과 행동에서 남들보다 못한 자녀의 외로움을 가슴으로 보듬을 수 있다.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했기에 선배와 동료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며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는 협업으로 자녀를 도우려 한다. 부모의 삶이 애초부터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들이었기에 무리지어 버티고, 무리지어 숲을 이루는 법을 안다. 나의 짧은 생이 끝나도 이 숲 전체가 함께 하면 내 작은 꽃 같은 아이를 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죽음을 꿈꾼다. 아이 앞에서 부끄러운 나의 지식을 내려놓고, 나의 지위를 구하지 않고, 늙어가는 외모와 약해지는 건강에 더 자유하며, 민들레 같은, 제비꽃 같은, 애기똥풀 같은 작고 여린 장애인의 모습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썩어지기를, 그리하여 내 죽음이 꽃무리가 되기를, 울창한 숲이 되기를 꿈꾼다. 오직 내 모든 말과 글과 노래가 내 것이 아닌, 내 사랑하는 장애아들의 소리로만 널리 퍼져나가기를 오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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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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