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알리고 생각해 보아야 할 몇 가지 것들이 있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인 사실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그 사실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 때로는 사실들에 관한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글이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필자가 가장 먼저 일러두고 싶은 사실은 이제껏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칼럼이라는 글과 칼럼니스트라는 글 쓰는 이의 성격상 전문적인 글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필자의 짧은 식견과 전달력 부족 등의 이유를 미리 고지하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필자에 관한 몇 가지 것들을 더 언급해야겠다. 필자는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업 작가다. 여기서 작가라고 하니 작가의 종류가 너무 많아 헷갈린다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름, 호칭 또는 명칭은 언제나 중요하다.

필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화가로 불리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법적 효력을 갖는 직업군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필자는 작가로 불린다.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이 말은 현대에 통상적인 의미에서 예술가를 지칭 할 때 쓰인다. 다시 말해 필자는 예술가란 얘기다(이 호칭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필자에 관한 두 번째 사항이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필자는 장애인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서와 비슷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다.

필자는 생후 3개월에 뇌성마비로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 평범한 학교생활과 평범한 낙제와 평범한 수석합격을 했지만 일부 영역(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하자)을 제외하고는 신체적, 사회적, 정치적 장애가 거의 없었다. 물론 관점을 달리하여 외부의 차별적 시선과 신체적인 한계가 있었을 수 있으나 필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직업적 자립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크게 인식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필자에게는 장애가 전혀 없었으며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통상 학창시절에는 학생이라는 지위가 부여하는 보호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므로 사회인으로서 받는 차별의 압력보다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애의 종류와 정도, 차별과 정체성, 사회와 개인의 문제에서 장애와 장애인을 어떻게 정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장애인이다.

이제 이 칼럼의 두 가지 주제가 나온 듯하다. 장애와 예술이다. 필자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실토해야겠다. 일부 독자들이 기대하듯 필자 자신이 장애인이고 예술가라고 하여 장애인 권익운동이나 장애 해방운동, 또는 장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 배경과 예술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나 담론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하거나 그에 관한 새로운 노선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사뭇 실망스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아마도 필자가 이번 회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이름이 지칭하는 것과 이름 사이에는 별 연관이 없을 수도 있고 또한 그 이름이 뜻하는 의미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이 뜻하는 바와 그것이 지칭하는 사물이나 행동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예술이 의미하는 바는 시대와 장소, 사람과 그 사람들의 정신과 말에 따라서 무한히 변화해 왔으며 지금도 그 의미는 변화하고 있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그리스 로마시대의 예술은 조선술을 포함하는 수공예 기술과 넓게는 토목기술에 이르는 광범위한 생활영역의 기술을 의미하였던 반면 지금은 예술로서 당연시 하는 시와 음악은 예술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예술의 어원인 라틴어 아르스(Ars)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를 번역한 것이며 테크네(Techne)는 실생활에 쓰이는 기술이라는 뜻이다.(미학의 기본 개념사. W. 타타르키비츠 저. 손효주 역. 미술문화. 1999)

이처럼 필자를 포함한 우리는 예술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 자체에 관해서 아무것도 고정시킬 수 없다. 그것이 관념이건 작품자체이건 간에 말이다.

그러면 우리의 두 번째 주제 장애는 어떤가? 우리는 사전을 뒤적여 장애가 뜻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은 온갖 부정적인 관념의 집합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현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2004년 당시 제시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 제2조(장애)에서의 장애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장애’라 함은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차이를 이유로 장·단기간 발생하여 일상·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주는 사회적 태도나 물리적·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거나 제한받는 것을 말한다. ‘장애인’이라 함은 현재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과거에 장애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최근의 장애 정의를 아무리 완곡하게 사회정치적인 의미로 정리해 봐도 통념상 부정적인 어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장애는 예술과 다르게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장애인 예술가들이 ‘장애예술’이라는 낱말을 만들기를 꺼려하는 태도와도 관련 있을 것 같다.

앞서 보았듯 장애와 예술은 서로 별 상관없는 의미 영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의미 영역이라고 하여 실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는 말은 아니다. 장애와 예술 모두 실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다만, 하나는 상실하거나 제한 받는 일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무한히 확장되는 개념의 영역을 말한다. 장애인과 예술가를 말할 때도 이와 같다. 하나는 막혀있는 사람이고 하나는 확장하는 사람이다. 장애는 부정적인 가치의 표본으로, 예술은 최상의 인간가치의 하나로 인식한다. 장애인의 생활이 실재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의 의미는 그렇다. 예술가 개인이 실재로 범죄자이며 인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창조한 예술은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다시 말하지만 장애와 예술은 서로 다른 사회영역이거나 학문영역이며 둘이 접근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앞서 자신을 예술가로 소개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글을 써야 한다면 글 쓰는 행위도 자연스럽게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객관적으로 엄밀한 논설로 독자들을 설득할 글을 쓸 재주는 없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기예술에 대한 소신과 비전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예술가로서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목격해 왔으며 그 큰 흐름 속에서 예술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체감해 왔다. 예술은 이제 기술과 과학의 날개를 달고 인문학과 사회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예술을 꿈꾸고 있다.

예술은 이미 오래전에, 아니 인간에게서 발생하던 그 순간부터 가장 보잘 것 없는 돌과 조개껍데기를 예술품으로 바꿔왔으며 현대에 들어서 쓰레기와 산업폐기물(정크아트), 인분(피에로 만조니)과 개인 침실의 온갖 잡동사니들(트레이시 예민)도 예술품으로 바꿔 놓는다.

필자는 예술가로서 동시대 예술의 이러한 흐름이 장애를 경험하는 부정적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 경험이 예술적 체험이 되게 하며 그 체험이 다시 예술영역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거나 발전할 수 없는 세계에 들어서고 있다. 의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전에는 홀로 맞이하는 부정적 경험이던 장애가 예술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보다 확장된 인간경험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장애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을 것이다. 본 칼럼은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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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며 선사랑드로잉회, 뇌성마비작가회 날 등에서 장애인 문화예술행사와 전시기획을 해오고 있다. 칼럼에서는 장애인예술을 현대미술이론들과 동시대 담론들을 통해 조명하고, 역할과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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