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서 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직업재활관련 시설들이 필요하다. 일반 기업이라면 자본과 인력, 상품 아이템 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기업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은 시설만 있으면 지속적으로 유지가 가능하다. 운영비는 후원금이나 법인의 전입금,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으로 충당하고, 인건비는 지자체의 보조금으로 충당이 된다.

보통 직업재활시설에서는 인력을 직원과 근로자로 나뉜다. 직원은 정부로부터 인건비 보조를 받는 직업재활 전문가나 행정을 보는 사무원들이다. 이들은 장애인을 위해 고마운 일을 해주는 분들이다.

그리고 장애인 근로자들이 있다. 이들을 직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직업재활시설에서는 근로자에게는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수익금이 발생하면 이를 나누어 주면 된다.

최저임금 미적용 사업장이라고 해도 비장애인은 최저임금을 보장받는다. 그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아무도 붙어 있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사업지침으로 정한 급여기준에 의해 보조금을 지급받는다. 단지 장애인만이 이 적용을 받지 않는다.

시설 종사자들은 발달장애인이나 중증장애인의 직업재활을 위해 무단히 노력하고 있고,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장애인의 고용문제를 밤낮없이 고민하고 있고, 새로운 직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힘을 쓰고 있음은 분명하다.

중증장애인이 일을 통해 기쁨을 가지고 자아성취와 삶의 의미를 찾고,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얻고 사회와 통합되므로 장애인의 직업재활은 그 의미가 너무나 크다.

그런데 이 시설의 법인이나 종사자들이 장애인들과 늘 보는 얼굴에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는 생활을 연속하다 보면, 타성에 젖을 수 있다.

자신들의 급여는 어차피 정부가 주는 것이고, 장애인들은 이익이 남으면 사람 수대로 나누면 되는 것이고, 적자를 볼 일이 없으니 현상 유지만 하면 평생직장으로 월급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속으로는 장애인시설이 아니라 장애인이 도와주는 종사자 시설이 되고 만다.

이 두 시설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그 판단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현재 객관적 평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실적 등을 통해 평가가 가능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리 쉽지가 않다.

어떤 지역은 지역 특성상 상당히 저조한 실적이라도 지역 장애인을 위해서는 시설의 존재가치가 필요충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장애인을 고용하면서 급여는 고용장려금이 나오니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주겠다고 했다.

당신은 너무나 중증이고 사회적 경험이 없고 시설이나 가정에서 밖으로 나와 본 적도 없어서 사회적 경험도 부족하니 우리 사무실에서 경험도 쌓고, 일을 할 수 있는 정보나 기회도 갖도록 경력을 쌓기 위해 고용의 배려를 하겠다는 것이다. 단지 급여는 줄 형편이 되지 못하여 고용장려금이라도 나오니 그것을 줘서 용돈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고용확대를 위한 행위인지, 고용학대를 한 행위인지의 판단은 사실상 쉽지 않다. 고용주가 커피 심부름이나 공짜로 시켜먹자고 마음 먹었다면 고용학대일 것이고, 형편은 되지 않아 기회를 준 것이라면 선의일 수도 있지만, 고발하면 범법자이기도 하다.

대학에 다니면서 야간업소에 일을 나가는 여학생이 있다고 하자. 대학에서 학교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니 학생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형편이 어려워 야간업소에서 일하면서까지 인생을 개척하여 보고자 학교까지 다니고 있다면 이는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둘의 차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이다.

직업재활은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의 티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아무리 태만하여도 그 태만의 티가 별로 나지 않는다.

중증 장애인이라서 원래 어려운 일이었기에 잘 되기도 어렵고, 현재의 단순 업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장애인의 탓이고, 그것마저도 고마운 일이기 때문이다.

둘의 경우 모두 장애인과의 끈끈한 관계와 장애인 사랑을 보여줄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업체인가, 아니면 장애인을 이용하는 업체인가의 차이는 사실상 백지 한 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

대기업이 장애인을 위한 상품을 만들지 않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최근 고용부담금을 줄이기 위해 자회사를 운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특수학교 교사 지도를 나온 장학사가 교육과정이나 개별화와 학습효과에 대하여 지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과 힘들게 생활하는 너무나 고마운 선생님들의 고생만 생각한다면 감사인사로 지도는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업재활에서 장애인들을 데리고 고생하시는 종사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고마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잘못이다. 물어본다면 화를 내며 부정하지만, 절대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열심히 하고 있는 종사자들까지도 가끔씩은 우리가 장애인을 위하고 있는가, 아니면 장애인들이 우리를 위하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장애인 복지라는 거대 시장에 전문가라는 빨대를 꽂은 인사들은 무수하다. 여기서 갑질이나 태만이 존재한다면 장애인의 몫이 없어지거나 장애인복지가 오히려 더렵혀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장애인 10여명만 모아놓고 직업재활시설만 가지면 4명 정도의 급여는 1, 2년 고생만 하면 지자체가 준다는 식의 기다림은 참을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우리가 그 기업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제동을 걸 수 있을까? 그러한 시설조차도 미래에 큰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운영이 투명해야 하고, 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실적이나 규모가 아니라 연구하고 노력하며 직업적 마인드로 행동하는 직업재활시설 종사자가 필요하다.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면 상당한 수익금은 자기가 가져갈 수 있어 오히려 축재가 쉽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장애계를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끝없이 장애인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장애인계의 보석으로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종이 한 장의 차이를 식별할 리트머스 용지를 정부는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최소한 종사자와 근로자가 구분되는 직장에서조차 선생님과 이용자로 구분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직장을 나가면서 직장 이용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수익성이 낮은 업종, 외국근로자의 대체인력으로 배치되는 업종, 아르바이트보다 싼 값으로 이용되는 판매업종에서 파트타임의 싼 임금으로 발달장애인이 이용되는 것이 일자리 창출로 환영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외국의 축구공 생산이나 커피농장에서 아이들이 노동착취를 당한다는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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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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