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사성어를 공부하면 한번쯤 들어봤을 단어가 바로 ‘모순’(矛盾)입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의미로 이야기를 한다면, 고대 중국의 어느 상인이 창을 판다면서 ‘뭐든지 뚫는다’ 라고 말하고, 방패를 판다면서 ‘뭐든지 막는다’ 라고 말하니, 어느 군중의 돌직구가 일품입니다. ‘그렇다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나요?’ 이를 들은 그 상인은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요즘은 광고 카피에서조차 ‘앞뒤가 똑같은’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이고 이것이 히트를 쳐서 그 광고 카피를 활용한 CM송도 중독성있게 대중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인 시대에 왜 이런 모순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저번 시간에도 발달장애학생 직업능력개발센터(이하 센터)에 대해 이야기를 했건만,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고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혐오 정서가 주민들을 ‘잡아먹어서’ 센터의 진실과 발달장애인 사회의 절규가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지적하고 싶은 모순은 바로 “장애인은 혐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학교 내에 장애인시설을 건립하는 것은 반대합니다!”라는 주민들의 논리입니다.

이번에는 논리와 수학에서는 ‘명제’라고 말하는 이론을 빌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렇게 ‘증명’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저는 대학시절 유명 공대를 다니다가 졸지에 동기가 되어서 서로 도움을 받곤 했던 동기에게서 간단하고 짧은 ‘강의’까지 들었습니다. 논리 이론을 설명해 준 그 동기에게 일단 고마움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논리의 앞부분부터 뜯어보겠습니다. 앞부분에서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의 결론은 장애인이 사회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임을 인정하고 사회 공동체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적극 옹호하고 관련된 지원에 적극 협조하고 이해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장애인을 혐오한다면 장애인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시설’에나 ‘가두고’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 논리의 앞부분을 뒷받침하려면 논리의 뒷부분도 ‘맞는 명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뒷부분의 논리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모순’이 명제가 됩니다.

이 뒷부분의 논리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증명하면 이렇습니다.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장애인이 사회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임을 인정하고 사회 공동체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적극 옹호하고 관련된 지원에 적극 협조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보조 논리’가 있습니다.

이 ‘보조 논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보조 논리가 앞 논리를 뒷받침 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학교 내에 장애인 시설을 건립하는 것에 반대한다’라는 말은 ‘관련된 지원에 적극 협조하고 이해해야 한다’라는 명제와 충돌하게 됩니다.

적극 지원해야한다라고 했는데 그 지원을 반대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순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장애인 시설’의 정체는 바로 센터였습니다. 넓은 의미에선 '시설‘이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센터는 ’학교‘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설‘이죠?

‘다만’이라는 말에도 논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논리 전체를 따졌을 때, 앞 논리는 뒷 논리를 덮기 위한 거짓 논리일 가능성이 있고, 진짜 논리는 ‘다만’ 뒤에 숨어있습니다.

앞 논리는 ‘다만’ 뒤에 붙을 논리를 합리화하여야 하는데, 자칫 장애인관련 기관, 즉 여기서는 센터의 입주를 ‘장애인에 대한 혐오’라는 명목으로 반대할 경우에는 반대로 자신들이 여론의 역풍을 맞아 ‘장애인 차별 행위자’로 낙인효과가 찍힐 우려가 있다는, 그들의 ‘붙이지 않아도(어차피 논리가 성립할 수 없지만 하여튼) 나오는 논리’를 들먹인다면, 그리고 이렇게 언론에 알려진다면, 과연 여론이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아쉽게도 ‘다만’속에는 그들의 절규가 있습니다. ‘다만’ 이라는 용어속에는 이 상황에서는 빤히 드러나는 본심을 말하기 위한 열쇠가 아닐까 싶습니다.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표창원 박사 같은 분들이라면 저보다 더 정확히 그 ‘다만’을 붙인 이유를 알겠지만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들이 왜 ‘다만’ 이라는 단어를 굳이 붙여서 무엇을 꾀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은 사회심리학자같은 자들만이 알 수 있겠지요.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JTBC가 재미난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그들의 뻔히 드러나는 속내인 ‘땅값에 대한 두려움’은 그저 공포일뿐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특수학교가 있는 곳 근처의 땅값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JTBC가 공개한 진실이었습니다. 떨어진 곳이 있다 해도 극 소수였고, 그 주위까지 헤아린다 해도 변함이 없었고 어떤 마을은 오히려 오르기도 했다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불편한 진실 속에서, 왜 반대 주민들은 혐오하지 않는다면서 혐오를 말하는 괴상한 역설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센터가 들어선다 해도 자신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증명되었습니다.

장애인은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옆에 있습니다. 장애인은 귀신도 아니며 괴물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돼 조건이 꽤나 복잡할 뿐입니다.

센터에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센터가 들어서도 당신의 삶은 변화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발달장애 학생들이 그냥 같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과 당신의 삶은 다릅니다. 성일중학교는 계속 존속할 것이며, 당신의 삶은 그냥 그 이전의 삶과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오히려 겁을 먹어야 할 분들은 반대하는 주민 자신들입니다. 한국사 국정화교과서와 달리, 이것은 실체가 없는 공포이고, 자신들 자체가 논리학적 모순에 복종당했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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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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