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필자 역시 이제껏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더욱이 ‘장애’라는 굴레를 짊어져야 했기에 삶이라는 것이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굴곡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내적인 트라우마’ 혹은 ‘콤플렉스’도 덧붙여졌다.

필자는 외적인 ‘장애', 내적인 ‘콤플렉스’와 투쟁하며 얽혀 뒹굴며 살아왔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결점이나 질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외적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면, 필자의 장애는 외적으로 너무나 확연하게 잘 드러나는 터에 늘 실제보다 더 안좋게 보이곤 했다.

이런 이유로 특히, 외모나 행동거지 등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필자는 자주 발가벗겨진 것 같은 정도의 수치심과 당혹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예를 들어, 옷으로 온 몸을 덮거나, 성형수술을 하거나, 혹은 투명인간이라도 돼서 자신을 감추고 싶었다.

늘 비교하고, 외모로 사람의 전부를 평가하는 사회에서 온전한 마음이나 정서를 유지하며 삶을 산다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경우에도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남들에게 잘 보이려, 허세를 떨고, 부를 과시하고, 미모를 뽐내고, 배경을 들먹인다. 심지어는 극단적 방어심리에서 지레 먼저 뒤통수를 치려고까지 한다.

이런 이유로, 비단 필자나 장애인이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내면은 열등감, 원한감정, 복수심, 그리고 피해의식으로 심각하게 얼룩져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의 원인은 이런 내면적 상처와 정서적 왜곡,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격상실과 관련된다고 판단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서로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울부짖으며 어떻게 해서든 앙갚음을 하고, 뭔가를 받아내려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운전을 할 때도 양보라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거래를 할 때도 상대를 결코 신뢰하지 못하며, 개인들 간의 약속 같은 것은 거의 농담처럼 받아들이며, 기초질서를 무시하고, 공적 규정들을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피하려 혈안이 되곤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울부짖음과 생떼에 지쳐 그들에게 최소한의 자제를 요구라도 하는 날엔 마치 벌집을 건드리고 불구덩이에 기름을 부은 것과도 같은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전 국민이 한이 맺혀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유독 ‘장애인’들에게 흔히 주문되는 것이 있다. 바로 ‘장애극복’이다.

오래 전부터 종종 대중 매체를 통해서 장애극복의 미담들이 전해지곤 했는데, 이것의 골자는 늘 한결같다: “현실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인’들도 해내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라는 것이다.

사람들 중의 일부는 이런 미담을 접하면서 ‘그래 장애인들도 해냈는데, 나도 더 노력하자’라고 자신의 마음을 다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신화 같은 미담들은 기존의 ‘장애인 인식’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다수의 장애인들에게 ‘장애’가 철저히 장애인 자신의 몫일뿐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장애인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며, 그저 가끔씩 신화 속에서만 나타나게 될 때, ‘장애’ 그 자체는 여전히 철저히 부정적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들의 문제들은 거의 전적으로 남탓이라 여기면서도 장애인들에게는 스스로 서라고 권한다는 것은 윤리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필자는 누군가로부터 “형제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라는 진심어린 권고를 받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건대, 그 말 자체는 맥락에 따라서는 사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몫이 있으며, 그에 대해서는 온전히 스스로 감당하고 자기 힘으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온 사회가 피해자 코스프레로 늘 난리법석이며 살벌하기까지 한 마당에, 그리고 하나라도 더 자기 것을 확보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장애인들에게만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를 권하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가혹한 장애인 차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필자 역시 ‘미담(美談)’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필자를 억누르고 왜곡하는 모든 문제들로 해방되어 온전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서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장애극복’은 결코 타율적이어서는 안 된다. 상대적 약자가 아닌 절대적 약자인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사태다. 장애인들은 철저하게 ‘타자(他者)’로서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 역시 인간이기에 각자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인간적으로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장애극복이 ‘과제’로 드러나는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장애인 자신의 의식과 결단의 결과이어야만 한다. 거기에 비장애인들이 개입돼서는 안 될 것이다. 비장애인들, 혹은 사회가 개입되는 경우는 오직 장애극복이 ‘권리’로서 드러나는 경우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현대사회의 이념에 기초해서 장애인들 역시 각자의 의지대로 살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사회는 너무나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의 문제가 상대 때문이라고 소리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몫을 챙기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터에 주변에 장애인이 있는가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아니면, 장애인들이 한 마디라도 할라 치면 “가뜩이나 정신없으니 너희들은 좀 조용히 있어라!”는 식이다.

때로 복잡한 문제들은 아래로부터 접근할 때 풀리곤 한다. 사람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차분히 장애인 문제로부터 하나 하나 이해하고 풀어간다면, 어느 새 큰 문제들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 전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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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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