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뛰어 노는 우리 아들을 바라보면 4년 전 임신했을 때가 생각난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뇌병변 중증 여성장애인인 나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이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 중 하나는 임신과 출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전반적 사회인식에 관해 배척하거나,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장애인이나 35세 이상의 여성들은 임신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특히 나와 같은 중증 여성장애인이 임신하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의 우려 섞인 말을 하며 낙태를 권한다. 산모가 위험해질 수 있고 자기네 병원에서는 이런 사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물론 그렇지 않은 병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게는 지금 37개월을 넘긴 남자 아이가 있다. 항상 아이를 생각하면 한 쪽 가슴이 뻐근해짐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치고 가슴 벅참을 느낀다.

처음 해찬이를 만났을 때는 자궁 초음파의 한 점이었다. 그 조그마한 점이 내 뱃속에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큰 두려움이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뇌병변 중증 장애인이다. 아이는 원했지만 둘 다 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입덧이 시작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양성반응. 순간 머릿 속이 아찔했다. 너무 기뻐서이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 다음날 나는 진짜 임신인지 병원에 가서 확인을 했다. 초음파 속 작은 점, 그게 아기라는 말에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내가 약을 먹고 있었기에 혹시 그 약이 아이한테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우선은 이 기쁜 소식을 시댁과 친정에 알렸다. 약을 처방한 병원에 가서 해로운지 아닌지를 확인했더니 그 약은 아이한테 해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끊었다. 그 약은 나한테는 경직을 완화시키는 약이었기 때문에 끊으면 내가 힘들었지만 아이한테 해가 된다니 끊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임신 소식에 시댁은 좋아했지만 약간 불안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친정은 태어날 아이의 미래와 나의 몸을 생각해 완강히 반대했다. 나는 많이 고민했었다. 이 아이를 유지해 낳을 것인가 아니면…….

결국 고민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최선을 다해 몸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될 수 있으면 바깥 출입을 삼갔고 육아지식도 여러 곳에서 얻으려고 애썼다. 병원 검사도 꼬박꼬박 하러 갔다. 점점 배가 불러오자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꿈틀댐을 느끼니 신비로웠다.

입덧은 수월하게 넘어갔지만 아이가 점점 커지면서 내 몸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었다. 7개월 약간 넘었을까, 어느 날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열은 아니었지만 살짝 피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게 일주일이 지속됐다. 그래도 괜찮겠지 병원에서 약간 피가 보일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기어다녔기 때문에 아이한테 무리가 가서 조산기가 약간 있는 것이었다. 일주일을 버티다가 병원에 갔다 그것도 갑자기 배가 아파서. 7개월에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7개월에 아이를 낳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경악했었다. 그래서 이대로 유지하면서 9개월에 낳을 순 없겠느냐고 물어봤었다. 아이는 키워서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의사선생님이 버틸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조산을 막는 주사가 있는데 그걸 맞으면 산모가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어쩌겠나. 그런 방법밖에 없다면 그 방법을 쓸 수밖에.

그러기 위해 입원절차를 밟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좋지도 않은 세상. 빨리 나오려고 그러는 것이냐! 엄마 뱃속이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더 있으렴.

나는 아이한테 부탁했다.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조산을 막으려 링거 주사를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맞아야 했고, 간호사들은 혈관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나도 힘들었다. 그렇게 한 달 반을 버텼다.

2012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오후 9시. 나는 우리 아이 해찬이를 낳으러 분만실에 들어갔다. 분만실에 들어가서 수술도구와 함께 침대에 눕혀졌고 마취약에 취해 잠이 든 사이 아이는 태어났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20분만의 일이다. 나는 그 후로 한 시간 반 만에 깨어났다. 아이가 무사한지 궁금했다.

깨어나니 아이 아빠가 옆에 있었다. 그리고 온가족들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이는 간호사가 와서 보여주었다. "3.2킬로그램의 건강한 사내아이예요."라고 얘기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가슴 졸이며 한 달 반동안 겪었던 고생이 아이를 보는 순간 기쁨으로 바뀌었다.

나는 회복실로 갔다. 병실로 올라가기 전 회복실에서 2시간 정도 있으면서부터 나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수술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많이 움직여줘야 분비물이 빨리 나올 수 있는데 나는 누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면서 몸이 안 좋아졌다.

그렇게 14일만에 퇴원했다. 모유수유를 하고 싶었으나 내가 통증이 심해지고 경직이 심해지자 경직약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이한테 모유수유를 못하고 그냥 우유로 대처하기로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아 다른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일단 시댁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형님이 아이를 봐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가 끝나갈 즈음 백혈구 수치가 내려갔고, 곧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그 때 왜 백혈구 수치가 올라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여성이 그것도 장애인이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건지 이 사회는 알까? 아니. 모를 것이다. 조금만이라도 안다면 이 나라 출산정책과 육아지원정책은 분명 나아졌을 것이다.

아직도 여성장애인에게는 임신과 출산은 넘지 못할 산처럼 느껴진다. 많은 장애인들이 결혼, 임신, 출산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사회 전반의 인식 자체가 다른 선진 사회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임신했을 때 반대하시던 친정엄마 말씀이 기억난다.

"일반인도 요즘 아이 키우기 힘들다 하는데 몸도 성치 않은 네가 어떻게 낳아서 키울래? 자라면서 남들과 다른 부모를 보면서 겪을 혼란을 어떻게 하려고? 안되는 일이야. 네 몸을 위해서도 안돼! 병원에서도 위험하다고 했다며."

가족조차 이해해 주지 않는데 사회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건 힘들 것 같다.

임신 고위험군에 대한 사회 안전망이 설치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안전하게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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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영 칼럼리스트
광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고 있는 이용자이자 한국뇌변병장애인인권협회 광주지부에서 새내기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중증장애인들의 활동보조인들에 대한 생각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일상생활에서 그려갈 계획이다. 자립생활 7년차 결혼생활 4년차인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나의 모습과 주변 장애인들의 생활상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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