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에베레스트 원정대 캠프 모습. ⓒ송경태

"쿵!"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15분(현지 시각). 네팔 에베레스트산 캠프 원(1)(6100m) 지점에서 둔탁한 굉음이 울렸다. 진도 7.8 강진이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도전한 나는 그날 새벽 베이스캠프(5300m)를 떠나 캠프 원()로 향하고 있었다. 땅이 성난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왼쪽 무릎이 맥없이 꺾였다. 순간 초속 20m 가까운 눈 폭풍이 불어와 나의 몸을 강타했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순간적으로 눈사태가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빛을 전혀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오로지 진동과 소리만으로 사태 파악에 집중했다. 눈밭에 엎드린 채 시간을 쟀다. 1초, 2초, 3초, 4초…. 위기에 빠진 내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진과 강풍은 정확히 42초 뒤 잦아들었다. 이후 우리 일행 6 명은 악전고투 끝에 산에서 내려왔다. 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크라(2800m)를 거쳐 수도 카트만두(1345m)로 돌아오니 8000여명이 죽고 1만7000여명이 다친 대재앙의 현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헉헉, 하악, 하악, 쿵”

순간 번쩍하면서 눈앞이 노래진다. 너무 노래서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대지진으로 쩍쩍 갈라진 얼음구덩에 고꾸라졌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태세로 덤벼드는 수많은 크레바스들. 심장을 쥐어 뜯는 심한 호흡곤란. 머릿속을 후벼파는 격렬한 두통 그리고 토사곽란이 수시로 찾아왔다. 손끝에 감각이 없다. 발끝에도 감각이 없다.

아, 두렵다. 내 몸 속의 모든 에너지가 밖으로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못 간다. 한 발짝만 더 가서 멈추자. 그리고 쉬자. 아주 편히 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다.

순간 남겨 놓은 가족과, 끝을 생각하는 평소 습관대로 혹시나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써 놓은 유서가 떠오른다. 이대로 주저 앉으면……. 아, 직장의 월요일 회의에서 나의 유서를 읽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아아, 에베레스트. 이 산은 너에게 진정 무슨 의미인가? 또한 너를 아는 분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 산에서 너를 다스리면 너를 통해서 누군가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하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로 한 발짝 한 발짝이 헉헉대는 호흡과 연결이 된다. 나와 대원들 서로의 몸을 묶는 로프가 스쳐 지나간다. 소리를 지른다. 이마의 고드름과 나오자마자 얼어붙는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가 고체가 되어 떨어진다.

새벽에 출발 전에 "영하 30도예요. 체감온도는 영하 40도는 될 것 같아요. 오늘 양말 3켤레 신어요"하던 대장의 목소리 색깔이 너무 선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땅이 흔들리지도 않다. 춥지도 않다. 아! 나는 이미 집에 와 있구나.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자 너무 시커멓게 타고 수염이 더부룩해진 나를 알아 보지 못한 아내 곁에 누워있구나. 아! 행복하다. 흔들리지 않는 땅을 걸을 수 있고, 아침에 물로 세수를 한다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설레인다.

어린이집에 가려고 준비물을 챙기면서 손자와 손녀가 서로 옥신각신 하는 모습조차도 아름답게만 보인다. 오늘 아침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 할 정도로 생각을 깊이 하여 그저 과거의 한 토막 시간여행을 한 것 같다.

그렇다. 이제 나는 땅이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땅, 축복의 땅, 혹한이 없고 산소가 풍부한 곳, 생명의 풀이 있는 곳, 미끄러지지 않는 안전한 길이 있는 곳에 있는 것이다.

마냥 행복하다. 아아!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던가?

지진 전, 평온한 캠프 모습. ⓒ송경태

며칠 전까지 나는 강진을 만나 땅이 성난 파도처럼 출렁이고 쩍쩍갈라지는 에베레스트에서 극도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산악회 창립 70 주년 기념 프로젝트로 ‘2015 시각장애인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도전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켜서 왔다면 백 번도 더 포기를 했을 것이다. 뭔가를 생각하겠다고 의미를 두면서 참가했지만 내 머릿속은 한 걸음만 내디뎌도 강진과 눈폭풍으로 등산로가 완전 유실되고 쩍쩍갈라진 크레바스를 건널 때마다 얼마나 두렵던지 하늘이 다 노랬다.

그리고 산소 결핍으로 가슴을 쥐어 뜯는 호흡 곤란과 금방이라도 머리가 쪼개질듯한 심한 두통과 노란 위액을 쏟아내는 토사곽란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남극에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인터뷰가 채 잊혀지기도 전에, 또 다시 에베레스트에 다가가는 경비행기 안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곳은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 간 곳’이라는 표현이 엄습한다. 아, 돌아갈까? 방법만 있다면, 자신에게 포기하면서 살고 싶다면 돌아가라는 의미 없는 대화를 해본다.

베이스캠프(5.350m)에 도착해 텐트를 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을 맞았다. 기온은 급강하여 영하 40도를 가리킨다.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자야 하는데 큰 고통이다.

삼중화를 제대로 신으려면 10분 이상 걸리고, 소변장소까지 가는데도 산소결핍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 분명한데. 밖으로 나오니 몸이 얼었다. 어렸을 적 우물가에서 세수하고 들어갈 때 문고리를 잡으면 손에 쩍 들러 붙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원정대는 크레바스(빙하 속에 생기는 깊은 균열)를 조금이라도 더 피하기 위해 새벽 2시에 출발했다. 낮보다 새벽에 이동하니 더 춥다. 머리 위에 고드름이 열렸다. 혀를 내밀어 나에게서 나온 수분이 고드름이 된 것을 미각으로 더듬어 본다.

길 옆으로 크레바스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크렘폰(아이젠, 신발 밑에 덧신는 강철 등산용구)으로 전달되는 눈 바닥이 속이 빈 것처럼 울리는 때는 가슴이 철렁하다.

오르막에선 뒤에서 못 올라가게 잡아 끈다. 아래로 내리막길이 있으면 뒤에서 육중한 무게가 여지없이 ‘쾅’ 하고 발 뒤꿈치를 찍는다. 이런 것을 조절하면서 극한 환경을 이겨내려면 뭐가 필요할까?

팀워크다. 생명을 자일에 묶고 서로의 몸을 돌보아주면 제대로 된 등반을 할 수 있다. 자일은 10m 앞 대원의 상태를 가늠하는 통신 더듬이다. 거의 텔레파시의 수준이다.

등반 중에 소변이 생각나면 큰 낭패다. 주위 사람들의 눈이 문제가 아니다. 생리적 해결을 하는데 10분 이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높이 오르면서 기압이 내려가면 평지에서 하는 일들을 기대할 수 없다. 거기에다 맨 살이 노출되면 금방 얼어버릴 것 같다.

아아, 꾹 참자. 어차피 세수도, 속옷도 보름 여간은 포기했다. ‘여행의 끝은 당신이 떠나온 자리를 다시 인식하는데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역시 가족이 계속 맴돈다. 눈물이 글썽인다. 대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제 잘 해 줘야지.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안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더 많이 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지 등등……. 많은 생각들이 마음 속 깊이 우러나는 것 같다.

고드름이 앞을 가린다. 과거를 다시 돌아본다. 정녕 너의 사명이 제대로 가는 길인가? 너는 너의 사명에 며칠,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

내면에서 답이 없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다.

무겁게 가지고 온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책을 다시 떠올린다. 이 책은 다른 팀원에게 크레이지(crazy) 소리를 듣고 있지만 나에게는 삶을 바꾼 커다란 의미다. 무게를 줄이려면 묻어야 하나? 가지고 가야 하나. 갈등이 헉헉대는 호흡 속에 묻힌다.

고도계는 계속 오름을 표시한다. 10시간 동안 계속 아이스 폴(얼음지대) 가파른 설사면을 오른다. 나는 왜 이런 행위를 하는가? 의문이 든다. 자신에게 물어본다. 답이 없다. 돌아갈 수 없으니 일단 올라가자는 생각이 유치하다.

이 생명을 끝까지 유지하여 가족과 만나야 된다는 생각이 몸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댄다. 괜히 에베레스트에 왔나 보다. 악마의 발톱으로 변한 쇠조각 같은 아이스 폴과 상어의 이빨로 변한 울퉁불퉁한 만년설은 내 발바닥을 꿰뚫고, 내 발목을 집어 삼킬 태세다.

낑낑대며 20m 수직사다리를 위태롭게 올라오고, 빌딩만한 얼음을 네 발로 기어서 올라와 고도계를 쳐다본다. 차라리 모르면 더욱 좋았을 것을. 고도 6.050m, 온도 섭씨 영하 35도를 가리켰다.

지진 직후 엉망이 된 캠프1. ⓒ송경태

그 순간 ‘드르륵 드르륵’ ‘쿵’ 내 몸이 순간 좌우로 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왼쪽 무릎이 꺽였다. 순간 눈폭풍이 휘몰아 쳤다.

“눈사태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눈폭풍에 나는 설인이 되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뿐이었다. 노출된 살갗은 금방 검푸르게 착색되고 모자 위엔 어느새 30 센티 폭설이 내려 앉았다. 눈얼음 폭탄세례를 맞은 재킷은 잘 털어지지도 않았다.

“살려달라!”

“구출해 달라!”

영어, 일어, 네팔어 등으로 무전기에서 울부짖음 소리가 고막을 계속 때렸다.

“지진이다! 안전지대로 피신하라!”

강력한 눈사태인줄 알았는데 교신내용을 듣고 강진임을 알고 우리는 캠프 원(1)을 과감히 포기하고 급히 하산을 결정했다.

방금 전, 올라왔던 수직사다리와 빌딩만한 얼음덩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산도 쉽지 않았다. 쩍쩍 벌어진 대형 크레바스와 유실된 등산로는 가져간 자일을 잘라 줄사다리를 설치해 새 길을 만들었다. 생명의 은인이 된 100 미터짜리 캐룰러 자일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 원정대 모두는 얼음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 후원해주신 업체 대표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산은 순탄치 못했다. 등산로는 거의 유실되고 크레바스에 설치된 사다리도 모두 사라졌다. 매 위험한 순간마다 우리 원정대원은 끈끈한 팀웍과 투혼을 발휘했다. 쪼개진 빙벽이나 절벽과 버어진 크레바스는 줄사다리와 로프를 설치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하산했다.

이런 곳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안내한 셰르파도우미와 원정대원, 그리고 머리 깊숙이 새겨진 가족과 친구, 지인들의 이미지도 에너지가 되었다.

한 걸음만 움직여도 심한 호흡곤란과 심한 두통으로 노란 위액을 토하고, 사방을 둘러 봐도 차가운 만년설을 피할 수 없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족을 떠올리니 눈물은 어찌 그리 펑펑 흐르던지.

옆에 있는 셰르파도우미 모르도록 소리를 죽이고 머리로 마음으로 내내 눈물을 흘렸다. 온 몸을 금방이라도 얼게하는 에베레스트에서 눈물은 시원한 물을 마시는 청량제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흙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만들어진 고글은 나의 눈물을 가두어서 얼음눈물덩이를 만들었다. 가끔씩 고글을 살짝 들면 '툭' 하고 신발 위로 눈물덩이가 떨어진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고 그 동안 조금이나마 잘못 살았던 삶을 반성해 본다. 특별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것이었다. 가족들 부모님, 친구와 지인들 등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면 잘 해주어야지 하고 다짐을 해본다.

멍한 순간이다. 셰르파도우미 배낭과 내 손에 쥐어 있던 생명줄 하네스가 갑자기 당겨진다. ‘헉!’하고 쓰러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딱 5분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엉덩이가 너무 차갑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은 용수철처럼 하늘로 튀어 오른다.

하산 내내 등산로는 폭삭 주저앉아 지옥의 길이요 형극의 길로 변했다. 80도가 넘는 깍아지를 듯한 빙벽과 수 십, 수 백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는 가는 내내 '내몸에 숨통이 왜 존재하나?'를 생각하게 했다.

입속서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금방이라도 고철덩이마저 녹여버릴 기세다. 송곳보다 뾰쪽하고 톱니보다 날카로운 빙하조각과 만년설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발목이 후들거려 숨통이 터질 지경이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험난한 폭설을 뚫고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포기냐? 강행이냐? 현기증이 돈다. 순간 가족생각이 혼미한 뇌리를 스친다. "하삐하삐! 아빠! 여보! 힘내세요!" 하는 소리가 고막을 강하게 때린다.

지진 직후 엉망이 된 캠프2. ⓒ송경태

정신이 든다. 재빨리 배낭을 벗고 귀중한 생명수를 꺼내 마신다. 아, 차디 찬 얼음 물이다. 몇 초 지나야 차가움이 따스함으로 바뀐다.

커피를 그냥 넣어서 흔들면 냉커피로 바로 마실 수 있고, 설탕물을 그냥 넣어두면 아이스 바로 먹을 수 있는 온도니 보온병의 따끈한 물이 얼어 있었다.

손과 발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발가락도, 손가락도 만년설과 날카로운 얼음에 노출되어 엉망이다. 꼭 어릴 때 할머니가 챙겨 주던 광주리의 홍시감처럼 변했다. 손과 발은 물렁거리는 순서대로 터지고 있었다. 꼭 구멍 난 자전거 튜브처럼 여기저기 실로 꿰매고 밴드로 땜질하였다. 동상에 걸려 탱탱 부은 곳은 칼집내 죽은피를 뽑아냈다.

설상가상, 날카롭고 뾰쪽한 빙하에 양어깨를 부딪쳐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숨을 쉬지도 못했다.

공포와 긴장탓에 급히 하산을 서두르다 그만 얼음절벽에서 20 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안전확보줄이 추락사를 면하게 해주었다.사방은 온통 뾰쪽하고 차디찬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여 앉아 쉴만한 공간도 없었다.

애처롭게 가야하는 이유는 뭘까?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는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몸에 뒤집어 썼다. 타는 목마름은 만년설을 씹어 먹으며 갈증을 해소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는 의미가 무엇일까? 과연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빅터프랭클' 의 '죽음의 수용소'가 생각난다.

아, 두렵다. 앞으로 얼마의 더 나 자신에게 고문을 시켜야 될지? 독수리 발톱보다 날카롭고 상어 이빨보다 뾰족한 빙벽이 나의 살을 얼마나 도려낼지? 칼바람이 얼마나 나를 냉동인간으로 만들어 버릴지? 계속 지축을 뒤흔드는 여진이 얼마나 발목을 붙잡을지?

아무튼 확실한 건 이것들은 나의 힘과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극한 상황이다. 더듬거리며 배낭에서 행동식을 꺼내 입에 억지로 밀어넣고 동료들 눈치 봐가며 생리현상 해결하기도 왜 그리 힘든지.

나는 삶에서 누구를 광명의 세계로 인도 하였는가? 누가 바른 길로 가도록 고무시켰는가? 나로 인하여 올바른 삶을 살도록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본다.

아내는 "왜, 고생을 사서하느냐?, 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후회가 된다.

많은 공포와 불안과 갈등 속에서 피오줌이 나왔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고 위로해 본다.

밤하늘은 별이 쏟아질 것 같이 선명하다. 솜털처럼 푹신한 눈밭에 누워 그대로 잠들고 싶다. 곧 모악산 기슭에 신축될 ‘송경태 희망원’ 그 곳으로 …….

베이스캠프가 얼마남지 않았다.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은 이미 육체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이내 페허로 변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돈다. 이제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기자. 죽음의 문턱이 삶과 바로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지진이 없는 나라, 맑은 산소와 푸른 산야를 가진 조국에게 감사한다. 다시 새로운 삶, 더 정직한 삶, 더 친절한 삶, 더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고,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삶을 살자고 다짐해 본다.

안타깝게 고소장애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양병옥 원정대장이 조속히 완쾌되어 예전처럼 원정대와 함께 산행할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도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그리고 네팔 대지진으로 많은 인명과 막대한 피해를 입은 네팔 국민과 셰르파가족에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위로를 드린다. 하루 속히 아픈 상처를 딛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그리고, 끝까지 불평 없이 안내해준 도우미 셰르파 게섭과 파상에게 감사드리며, 생사고락을 같이나눈 최병선 원장단장, 나관주 대장, 하태인 대원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후원과 성원을 보내주신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님을 비롯한 전국의 산악인 여러분과 전북지부 회원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열심히 응원해 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친구와 지인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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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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