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는 것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난리를 겪고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타락해갔던 조선은 마침내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동북아의 대격변기의 흐름조차 읽어내지 못하더니 결국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되면서 더 이상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는 데 불과 30여 년이면 충분했다. 감당할 수 없는 외적충격을 받은 조선은 자폐적 성향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점점 내적으로 광기가 득세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후 무려 근 300년 동안이나 철저히 망해가는 길을 걷게 된다.

‘예송논쟁’이란 이런 암흑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왕의 계모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가지고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온 나라가 난리가 난 것이다.

더 이상 국익이나 민생, 그리고 실질적인 효용성, 실재는 외면당하고, 오직 사상누각(沙上樓閣)적이면서도 허례허식적인, 그리고 위선적이기 짝이 없는 ‘명분론(名分論)’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근대화되고, 산업국가로 성장한 21세기 대한민국은,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장구한 악몽의 흐름에서 헤어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해 보인다.

38선 위의 북한이라는 괴뢰국이 여전히 철지난 시대의 명분론적 구태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철저히 망해가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조차도 여전히 내적으로, 잠재의식적으로, 명분론적 사고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나라와 국민들조차 여전히 체면, 체통, 겉모습, 예의, 그리고 명분과 구실 등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중시하는 경향성을 보이곤 한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광기와 어리석음에 충격을 받곤 한다. ‘탈레반’이란 이름은 그야말로 ‘원리주의’, ‘명분론’을 대표하며, 그 실상은 그저 악(惡)과 고통임을 잘 알고 있다.

즉 모든 명분론은 필연적으로 구체를 외면하게 되며, 사실과 실질을 파괴한다. 그리고 ‘테러리즘’이란 악업의 자연스런 결과다.

필자는 ‘장애인 등급제도 철폐’라는 주장에서도 어딘가 ‘원리주의/명분론’적 냄새를 맡곤 한다.

‘장애인에 대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이 부당하고 불합리하다.’, 혹은 ‘장애인이 마치 고기등급 매기듯이 취급당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장애인 등급제도 철폐 주장에 대하여 이것들 이외의 다른 이유들, 더 구체적인 이유들을 보고 싶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것들을 찾기가 힘들다.

필자는 묻고 싶다. “등급을 매기는 것이 그 자체로 정말 그렇게 큰 문제인가?” “세상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오직 ‘고기’와 ‘장애인’뿐인가?”라고.

군복무와 관련해서 모든 남성들은 등급이 매겨진다. 그런가 하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도 등급이 매겨지고, 더 나아가 대학 수험생 모두에게 등급이 매겨진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일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는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자신의 아버지께서 무릎인가를 조금 다치자마자 장애인 등록을 하셨고, 그 때문에 자동차 관련해서 여러 혜택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평생을 뇌병변 장애인으로 살면서 지금까지도 자동차가 없는 필자는 당시에도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이 나라의 현실에서 ‘장애인 등급제’가 그 어떤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하지 않은 채로 폐지될 경우, 삼중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우선, 장애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중증장애인들은 생존에 필수적인 서비스를 못 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모순적이게도 장애인 관련 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자충수이자 자폭이다.

‘등급’에 대한 주관적 콤플렉스 때문에 실질적으로 장애인들이 소외되고 세금부담만 가중되는 정책이 과연 설득력을 얻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과민할 정도로 ‘구별짓기’가 문제된다면, 아예 ‘장애인등록제’를 폐기하는 게 보다 명분에 부합하지 않을까?

사실, 필자는 ‘장애인’이라는 딱지가 싫어서 장애인 등록을 오래도록 미루었었다. 그래서 30대 중반이 돼서야 복지증을 얻었다.

우리는 명분보다는 실질을 따지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에게 실질이란 바로 생존과 취업이다.

만일 모든 장애인들에게 생존과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비전이 제시된다면, 더 이상 ‘장애인 복지’ 자체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필자는 중증이 아닌 이유로 생존에선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취업에서는 사는 내내 소외되었고, 그에 따라 여러 아픔과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누군가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이는 기본적 일상생활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최중증장애인들에게는 보다 집중적인 복지 재정이 할당되고, 장애인들 각자의 특성에 맞게 조기에 실질적인 직업교육이 갖추어지면서, 구체적인 이유 없이, 관념적인 편견에 기초한 차별에 대한 엄중한 재제와 처벌이 시행될 때, 이 땅에서도 장애인들은 비로소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복지’란 말 그대로는 소모이자 낭비다. 냉정한 사실이다. 그래서 ‘복지’는 최소화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복지’는 철저하게 실질을 추구해야 하며, 그런 한에서만 진정한 복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복지란 공동체 일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자선을 전제로, 사회적 불안과 그에 따른 공연한 소모를 방지하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적 이윤증대를 위한 현명한 투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최고의 실질적인 복지란 복지 수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갖게 하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일거리를 획득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일상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기회의 평등과 취업, 이 것이 관건이다.

관념과 명분은 필요 없다. 그 것은 대게 다른 목적을 위한 그럴싸한 구실에 불과하다. 더 이상 예송논쟁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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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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