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기업을 이끌던 성완종 회장이 자살을 한 사건으로 온 나라가 어지럽다. 그의 자살과 그가 남긴 메모와 관련한 온갖 억측과 루머가 난무한다. 그런가하면, 그가 자살하기 전 그의 녹취록을 보관하던 특정 언론사는 녹취내용을 조금씩만 공개하면서 절대갑의 위치에 서게 되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엠바고까지 선언했으니 뭔일이고 터질 것이다.

필자가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사건은 사건대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진행될 것이며, 나름의 방식대로 어떤 결말을 내릴 것이다. 그런 것은 그냥 두고 보면 될 일이다.

필자가 이번 사건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나라의 ‘공적문화의 부재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성완종 회장은 초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력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리고 빈손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서 마침내 대기업의 회장도 되고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는 위치에 까지 올라가게 됐다고 한다.

이야기가 이렇게만 마무리 되었다면, 그는 대한민국의 ‘전설’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화는 매우 안타깝게도 처참한 비극으로 마무리 되어 버렸다. 이 점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유감스럽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일자무식의 가난뱅이 시골소년이 어떻게 성공한 것이며, 다시 어떻게 해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필자가 ‘일자무식의 가난뱅이 시골소년’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요즘 흔히 말하는 ‘금수저’도 아니고, ‘가방끈’도 너무 짧고, ‘지역 연고적 특혜’도 없던 사람이다. 이는 우리나 사회에선 좀체 성공하기도 힘들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도 힘든 조건에 있던 사람이란 뜻이다.

명실 공히 대한민국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 독립한 수많은 신생 국가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현재 경제규모 세계 13위권이며, 무역규모만 따지만 6위 정도에 위치하는 선진화된 기적의 국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정도였던 나라가 불과 반세기만에 선진국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재 주춤하고 있다. 뭔가 근본적인 성장동력이 부족해 보이며, 기를 쓰긴 하지만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나라의 외적 규모나 모양새는 분명 선진화되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가 아직도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성의 결정적 요인들을 꼽자면, ‘개인적 독립성의 부재’, ‘공적질서의 부재’, ‘법치주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개인’으로서 살지 못하며, 대신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의 가치에 편승하거나 남의 힘에 기대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어딜 가나 ‘집단’, ‘패거리’, ‘당파’가 지배한다. ‘개인’은 없으며, ‘개인’이 되는 순간 서로가 왕따를 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공적 영역’조차도 ‘법’에 의해 원칙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며, 오직 여러 가지 사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인들, 즉 인맥, 학맥, 지역연고, 이에 더해서 외모, 패션, 가치관, 정치적 당파성 등과 관련된 획일화된 기준이나 유행 등에 전 국민이 묶여 있다.

고성완종 회장은 그런 조건에서 살아남으려 기존의 여러 패거리, 집단, 조직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허드렛일이나 막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얼굴을 알리고, 같이 어울리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들을 다했을 것이다. 그는 성공을 위해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지웠을 것이다.

필자도 경험한 바, 어떤 집단에서 전제로 하는 자의적 기준에 못 미치는 자가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집단에 들어가려 애를 쓰게 될 경우, 대게 인생 자체가 추해진다. 비루해지고 너덜너덜해진다.

필자는 고성완종 회장을 두둔하려는 것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아직까지도 옛날 산업화되기 이전의 서로 고립되고, 각자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획일화된 촌락 사회적 생활양식에 젖어있다는 우울한 사실이다.

이런 촌락 사회적 생활양식 속에선 ‘개인’은 불가능하며, 사람을 결코 그가 가진 능력이나 잠재적 가치로 평가할 수 없으며, 각각의 집단들끼리는 오직 경쟁, 배제, 갈등 관계만을 형성할 뿐이다. 이 나라에선 아직도 집단들간의 일종의 패싸움으로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이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왜 그토록 힘겨운 것일까?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철저하게 ‘타자’로서 배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제아무리 노력을 하고, 함께 하려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잠재의식은 견고하다. ‘너는 우리들과는 달라.’

그러다보니, 심지어 장애인들조차 스스로를 비장애인들과 다르다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역설적으로, 사회의 패거리/집단주의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온갖 시설들, 모임들, 조직들, 그리고 이어지는 일방적 주장들과 집단투쟁들…….

누구도 설득되고 싶지 않으며,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물론, 장애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처한 소수자들이다. 이들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집단주의에 대해서 일차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집단주의의 폐해는 다시 장애인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거기엔 소통도 나눔도 없으며, 결국은 그 집단의 내적인 차별과 단절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 사이에서 조차 귀족과 노예가 생겨나는 것이다.

흔들리는 이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좀 더 행복하고, 장애인들도 좀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선, 이 나라 안에 난립하고 있는 수많은 패거리, 집단, 촌락들이 남김없이 철저하게 해체되어야만 한다.

이 나라엔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구이건 간에, 무슨 명분과 이유이건 간에, ‘차별’을 ‘특혜’로 보상받으려 하면 안 된다.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도 ‘공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현재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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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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