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직전 장애인 복지관련 일을 하는 분을 만났다. 그 분과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가면서 자연스레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복지’에 대해서 이러 저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복지가 증진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체감적으로는 갈 길이 너무나 먼 현실에 대해 말할 때는 종종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곤 했다.

과연 실제로 개선된 측면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얼마 전 왕성한 활동을 하던 뇌병변 장애운동가 한 분이 화재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어렵게 식당에 딸린 작은 방 하나를 얻어 홀로 외롭고 고단하게 살던 중 식당에서 불이 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억울하고 안타깝게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신안 염전노예 사건의 해결은 범죄자 모두를 집행유예 처리하고, 피해자들이 갈 데가 없어 다시 염전으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나라는 온통 ‘복지’라는 말로 뒤덮였었다. 여기도 복지, 저기도 복지.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다 같이 살자. 그래서 국민 모두 가만히 앉아 ‘복지’의 수혜자가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하면, 거의 모든 동네마다 ‘여성회관’, ‘노인회관’, ‘청소년 회관’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장애인 복지관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들은 ‘차별의 희생양’이거나 ‘보호 대상’들로 존재할 뿐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못하다.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사실로, 설사 여러 가지 공적 서비스 체계가 구축된다 하더라도(물론 이것도 요원하다),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대략 반년 전에 건강보험관리공단에 항의전화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항의하는 것을 거의 해본 적도 없고, 또한 따져본들 별 수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참 견디기 힘들었다.

사십대 후반까지 나름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너무 부담스런 액수의 의료 보험료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관리공단의 무사안일적 태도에 이렇게 소리쳤다.

“세금이란 국민들에게 일을 주고 그 노동의 대가 일부를 징수하는 것인데, 도대체 일을 할 수 없게 하면서 이렇게 세금만 걷어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식이라면, 결국 나 같은 사람이 갈 곳은 시설 뿐이네요!”

아직도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일반 국민들은 장애인들에게 일 주기를 매우 꺼려한다. 여전히 장애인들을 자신들과 아주 별개의 하등한 부류로 취급하고 있음과 동시에, ‘정상적인’ 자기들조차 먹고 살기 어려운 판에 어떻게 ‘비정상적인’ 남들까지 신경쓸 수 있겠냐 하는 심사다.

그리고는 먼저 자기들 몫 다 챙긴 뒤에 혹시라도 남은 게 있으면 그 때 가서 한 번 주는 것을 고려해 볼 요량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식이면, 결코 ‘그 날’은 오지 않는다.

필자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엔 장애인이 대학에 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대학들은 장애인 입학을 여러 이유를 들어 거부하곤 했으며, 이 것이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정당화되곤 했다. ‘정상인들도 대학에 목을 매는 마당인데’라는 게 이유였다.

그런가하면, 필자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대한민국은 전무후무한 경제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엔 어지간한 대학생이면 취업은 거의 걱정하지 않았으며, 학점이 변변치 않아도 대기업, 공기업, 은행 등등 소위 번듯한 직장엘 들어갈 수 있었다. 공무원은 아무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 ‘풍요로운 시절’에도 장애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다들 먹고 살기 편하고 남아돌아도 여전히 장애인들에겐 주기 싫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현재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장애인 복지나 취업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공식적으로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라는 것이 있으며,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과징금을 물게 되어 있지만, 심지어 공직사회나 공기업들조차 여전히 장애인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일반 민간 기업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계산으로는, 장애인을 고용해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부담들보다 차라리 과징금 내는 것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발상이 ‘장애인 복지’ 전체에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왜 아직도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왜 장애인 복지의 개념이 ‘시혜(施惠)’나 ‘자선’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장애인복지’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기껏해야 비장애인들의 장애인관련 직업창출만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년 장애인 복지비를 증액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자리를 마련해도 아직 그런 일을 수행할만한 장애인들이 별로 없다는 논리를 들이미는데, 이는 전형적인 ‘직무유기’이자 ‘책임회피’다.

직업이나 일자리라는 것은 단지 ‘고용란’에 ‘장애인’을 추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일자리 창출이 진정성과 실효를 얻으려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하고도 실효성 있는 직업교육과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 인식개선과 차별금지 교육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하지 않는가?

문제는 아직까지 장애인 직업교육과 차별금지 교육 등에 돈을 쓰기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돈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생색만 내려 한다.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만 주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전체 비장애인이 이러한 사회 구조를 공모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의식 변화가 없는 한 진정한 인권도, 선진 사회도, 복지도 없으며, 그저 길바닥에 돈버리는 짓만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실제 선진국들과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다.

장애인복지는 인권의 기준이며 복지의 정점이다. 그래서 그것을 제외하고 인권과 복지를 논한다는 것은 그저 ‘낭비’이자 ‘기만’이다.

그리고 장애인복지의 본질은 장애인들도 인간으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삶에서 성취를 맛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장애인복지는 다양한 사업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에는 장애인들이 당당한 직업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단순한 비용 낭비나 도덕감정 낭비가 아닌, 실질적인 공동체 이익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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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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