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부터인지 한국에서는 소위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흐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하나의 현상으로 고착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드에 매혹 당하는 것이 그 자체로 신기하기도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이해가 되는 측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미드가 가지는 특징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소재의 다양성과 구성의 탄탄함이다. 간단히, 작품성의 측면에서 ‘한류(韓流)’라는 포장을 한 부도덕하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막장극’ 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에서 황금시간대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방영하는 일부 한국드라마의 경우 성격은 달라보여도, 그 해악성에서 ‘야동’을 능가한다.

이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미드를 즐길 때마다 다소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흑인’ 캐릭터들의 빈번한 등장이다. 비단 미드가 아니어도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흑인 캐릭터들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치 미국 인구의 30% 정도는 흑인들인 것 같다.

하지만 실제 흑인의 인구비율은 대략 12% 정도라고 한다. 장애인들 비율과 얼추 비슷하다. 물론, 미드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장애인이 흑인만큼 흔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보다는 많이 등장한다.

지난 28일 에이블뉴스에서 연 ‘2015년 에이블뉴스 가족모임’에 참석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는 다양한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백하건데 내 자신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이렇게 다양한 급수의 다양한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난 적이 없다. 그만큼 나는 이 세상에서 ‘섬’처럼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같은 장애인분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나는 그 즐겁고 따뜻한 모임에서 문득 ‘자기소외’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미국에서 거의 흑인들만큼 많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으로 싸잡아 묶여 반-추방 상태로 격리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내적으로 각양각색인 장애인들끼리도 일상에서, 그리고 공적으로 거의 접촉할 기회가 없다. 세상에 분명 장애인들이 많이 있음에도 현실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도 길거리에서 뭔가를 물으시려 다가온 어르신이 가까이서 1~2초 정도 필자를 확인하곤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을 겪는다.

그런가하면 아파트 엘리베이터나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정말 낯설고 이상한 것을 본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과 마주하곤 한다. 물론, 이런 일은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가씨들에겐 불편하거나 비호감인 낯선 존재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지만, 그 하나는 아예 안 보이거나 오직 그것만 보이는 기괴한 하나이며,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각각의 그런 ‘하나’들끼리도 서로 낯설어 하는 가련한 하나다.

더 나아가 그런 종류의 ‘하나’들을 위한 모임이나 일들에서도 여전히 대체로 명분이나 수단으로 남아있는 무력한 하나다.

나를 비롯한 장애인 일반의 상태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2~30년 전에는 장애인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다. 분명히 변화가 있기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그날은 여전히 요원하다.

내가 꿈꾸는 것들 중의 하나는 텔레비전에, 프로그램의 성격과 무관하게, 즉 드라마이건 아니건 간에, 막장이건 아니건 간에, 다양한 장애인들이 나오는 날을 보는 것이다.

지금 현재, 그 어떤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있으며, 노인들이나 아이들은 많이 등장하고 그들만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있다. 이에 반해, 장애인들은 없으며, 간혹 등장해도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철저하게 불쌍한 ‘장애인’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이래가지고선 도대체 아무것도 될 것이 없다. 장애인들이 일상의 이웃으로서 나타나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텔레비전을 안 본다. 장애인들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일 내 꿈처럼 장애인들이 온갖 프로그램들에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나는 텔레비전을 끼고 살 것이다.

텔레비전에 장애인이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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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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