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한 남자의 아내로, 세 살짜리 아이 엄마로 알콩 달콩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장수영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번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각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의 인생길은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이런 물음표를 갖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허비하며 살진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꿈꾸어 온 대로 살아가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 인생역전의 기회는 누구나 노력하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기회를 잡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나는 긍정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리고 웃음이 많은 편이라 남들이 조금만 웃겨도 웃음보를 터트리고 만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천사라 부르기도 하고, 바보라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한다.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말을 하거나 웃음짓기 때문에 약간은 바보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내면은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호기심의 눈길이나 편견의 눈길로 바라보지 말아달라는 것은 내 무리한 바래인걸까?

요즘 이런 의문이 든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나의 인생길에서 앞으로의 인생길이 어떻게 바뀔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얻은 것은 무엇이고 일은 것은 무엇일까?, 인생길에서 갈림길이 나올 때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등등…….

좌절의 순간, 절망의 순간들이 나를 무너뜨려 힘들어 하고 나 자신을 미워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말을 떠올린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인생은 선택의 순간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다시 길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길을 다시 찾은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한다.

나의 부모님은 깨어있는 분들이셨다. 나의 장애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셨다. 장애에 대한 아무 편견없이 키우신 나의 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 건 아닌지.

80,90년대 당시, 우리나라 상황은 위기의 시대이면서 사회변혁의 시대였다. 1978년 겨울 나는 집에서 신체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생후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열병을 앓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시골이라 주민들은 대부분 열병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했다. 나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나흘을 버티다 열이 내리지 않아 읍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진료를 하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너무 늦었다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여기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를 안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얼마나 우셨을지 얼마나 자책감이 드셨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서울병원에서 나는 뇌성마비라는 장애진단을 받았다. 그 곳 의사가 하는 말이 치료는 불가능하며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뇌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와 육신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아직 너무 어려 어디에 장애가 생길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 날, 나는 운명이 바뀐 것이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자식이 장애인이 되어버린 내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었으리라. 그 뒤로 서울과 담양을 오가며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36개월이 지나도록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경직이 일어나 손과 발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재활치료를 위해 광주로 이사했다. 나의 유아기는 집과 병원생활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담당의사인 오박사님께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에서 장애아를 위한 재활센터가 생겼다고 거기로 가서 입학절차를 밟아서 제대로 된 교육과 재활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정규교육과 재활치료를 받게 되었다.

처음 하게 된 단체생활이라 그런지 잘 적응하지 못했다. 5살짜리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엄마 품을 떠나 낮선 곳에 있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그 생활에이 익숙해져 가면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점점 재미있어져갔다.

은혜학교라는 특수학교에 입학해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다니면서 정규과정의 학업을 배우며 꿈을 키워갔다. 그 당시 나의 꿈은 작가였다.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했던 나는 대학진학을 원했다. 그러나 그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손과 발이 자유롭지 않은 나로서는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장애에 대한 편견이 많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장애인들은 부모 형제에게 자신이 짐스러운 존재가 되어감을 느꼈고, 어쩌면 한순간 잘못된 선택에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것임은 자명했다.

나의 가족도 예외 없이 금융위기 여파로 인한 중상층 붕괴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내 가족에겐 어느 날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 같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그 때 광주에서 살던 나의 가족은 그 지역에서 좀 알아주는 시장에서 터를 잡고 과일 가게를 십년 째 하고 있었다. 장날이면 분주하던 가게가 한산해지고 그런 날들이 늘어나면서 가게부채도 늘어만 갔다. 그 부체를 감느라 동분서주하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던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설로 가기로 결정을 했고,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그 곳은 지옥과도 같았다. 인권도 자유도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내 몸과 전신은 황패해져만 갔다. 이러면 않되지 싶었던 나는 부모님이 오실 때 이 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해서 그 길로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릴 적에 친하게 지내던 학교 후배가 찾아왔다. 그 후배가 알려준 정보는 나에게 참 유용했다. 자립생활 이념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고,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2008년 5월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나는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37년간 살아온 내 발자취는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다.

지금 나는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한 남자의 아내로, 세 살짜리 아이 엄마로 알콩 달콩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집안 한가득 장난감이며 동화책을 늘어놓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가 입안가득 지어진다. 아빠 엄마 들려준다고 동화책 펼쳐놓고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에 가족 모두 웃음꽃이 핀다.

밤이면 외할머니 품 속에서 자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내가 과연 엄마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엄마로서 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새해를 맞이하는 이 때, 가족의 평안과 안녕을 하늘에 빌어본다.

솔직히 나는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인생 공부하며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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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영 칼럼리스트
광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고 있는 이용자이자 한국뇌변병장애인인권협회 광주지부에서 새내기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중증장애인들의 활동보조인들에 대한 생각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일상생활에서 그려갈 계획이다. 자립생활 7년차 결혼생활 4년차인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나의 모습과 주변 장애인들의 생활상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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