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이 모두 고갈되어 버리고 내 속에는 오직 분노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 kbs 방송 캡처

체크 포인트를 출발할 때 민이 얼굴이 떠올랐다. 이역만리 불볕이 내리쬐는 사막에 내 피붙이가 함께 와 있다는 게 마음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잔인하리만치 가혹한 환경에서 체력의 한계점을 오르내리다 보면 생각마저도 하얗게 표백되어 가는 듯하다.

아들 민이 오늘의 레이스 종착점인 캠프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포기라는 생각이 말끔히 지워져 버렸다. 아버지 때문에 일부러 와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민이 탈락자를 실어 나르는 차량, 혹은 낙타 등에 실려서 돌아오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럴 순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러닝슈즈 바닥에 닿는 지면이 부드러우면서 발등으로 모래가 덮이는 게 느껴진다. 듄, 모래 지역이 시작되고 있다.

유지성 팀장 말에 의하면 코스 개설자가 레이서들 인내의 한계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모래 지역이 들어가도록 코스를 정했다고 한다. 모래 언덕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 레이서들은 흡사 늪지대를 만난 것 마냥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

모래 언덕의 경사면이 시작되었다. 내디딘 발걸음이 뒤로 밀리고 있다. 발걸음이 밀리지 않으려고 갈지자로 걸음을 옮겼다. 경사면을 오르는 거리가 늘어나면서 힘이 그만큼 더 들었다. 모래에서 올라오는 복사열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500여m 남짓한 모래구릉을 넘어가자 또다시 모래구릉이 시작되었다. 물을 마셨다. 마신 물이 타는 갈증은 해소해 주었지만 마른 육신에 생기를 넣어 주지는 못했다. 도대체 육체가 지닌 인내의 샘에서 얼마나 인내를 퍼올려야 한단 말인가?

헉헉대는 숨결마저도 햇볕에 메말라 버린 것 같다. 신발 속으로 모래가 스며들어가 빈틈을 다 채우고 있다. 영락없이 모래주머니를 달고 체력강화 훈련을 하는 꼴이다. 실전에서 편하기 위해 훈련을 하지만 한 톨의 체력마저도 아껴야 할 상황에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힘드는 건 고사하고 마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억지로 모래 속에 묻힌 발을 옮겨서 뒷발을 떼려고 할 때 앞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소리도 없이 스르륵 10여m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기분 나쁜 미끄럼이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을 누르는 인내의 쓴 즙을 삼켜야 하는데, 서른 걸음 가까이를 후퇴 하다니.

치밀어 오르는 울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고 일어섰다.

이 모래구릉을 ‘왜 올라가야 하지’라는 생각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또 10여m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악을 썼다. 절규도, 포효도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주체할 수 없어 광기에 사로잡힌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고갈되어 버리고 오직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내 속에서 분노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인백 씨가 힘겹게 올라간 위치를 포기하고 내게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관장님, 힘든 정도가 아니라 미쳐버릴 것만 같지요? 나도 지금 그래요.”

나는 다리를 뻗고 앉아서 고개를 늘어뜨렸다. 고개를 들고 있을 힘마저도 없어서였다. 인백 씨의 말이 귀로는 들렸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모래를 깔고 앉아 있는 엉덩이가 불에 단 솥뚜껑을 깔고 앉아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뜨거움을 참을 수 없어서 일어섰다. 뇌수마저 메말라버렸는지 머릿속이 염열로 일렁이는 대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나 이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

내 몸이 그렇게 말했다. 목적, 명분, 도전, 성취, 극복 따위 관념은 이글거리는 햇볕에 메말라서 분말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사막의 정적과 열기와 건조함이 나를 정화라도 시킨 듯 한 가닥 사념마저도 없는 상태에서 몸이 뱉어낸 말이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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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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