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이동이라 불리는 설을 앞두고 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결혼 후 맞이하게 된 시댁의 명절날 아침 풍경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시댁은 동네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살고 있어 집안의 남자들은 아주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명절날 아침 일찍 이웃 친척집들을 돌며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이 연례행사에 남편이 참석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설과 추석 때마다 어머니와 다툼이 생기고 중간에 낀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과 시아주버니는 둘 다 한국수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농인이다. 남편과 달리 시아주버니는 장남이라는 책임감 때문인지 시어머니의 말씀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하지만 남편은 시어머니의 온갖 불평과 핀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다.

남편을 남겨두고 시아주버니 혼자 나가면 그 때부터 시어머니의 불평이 시작된다.

“ 할 도리를 안하면 안된다”, “ 안가면 친척들에게 흉 잡힌다” “ 나중에 네 자식도 안 따라 다니게 될 텐데 큰일이다”

계속되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자세하게 통역을 해도 남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남편의 말인즉슨 친척들이 다 모여 차례를 지내고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음복을 할 때 농인인 자신과 시아주버니는 무슨 내용이 오가는지 알 수도 없고, 어느 때는 박장대소를 하다가 어느 순간 심각한 분위기가 되었다가 도무지 영문도 모르는 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남편의 입장과 시어머니의 입장 모두가 이해되는 나로서는 그래도 아들인 당신이 어머니 말씀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며 권유해 보지만 남편의 완강한 태도는 굽혀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참석을 권유했던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면서 남편의 입장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음성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같이 대화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통역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 시간들이 남편이나 시아주버니에게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하겠냐며 어머니가 아들의 입장을 헤아려주셔야 한다고 말이다.

그 후로도 오랜 동안 명절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시어머니와 남편의 입장 차이에서 오는 긴장감은 계속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친척들은 하나 둘 도회지로 이사를 떠나고 이제 몇몇 집안만 남게 되고, 바쁜 생활 속에 각자 왔다 가기도 바쁜 처지들이 되면서 집안 어르신들이 이제 각자의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하자고 동의하면서, 명절날 아침 시어머니와 남편의 팽팽한 줄다리기 풍경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나도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다.

어느 집안이나 일가 친척들이 함께 하는 집안 대소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많은 건청인 친척들 가운데 대화에 끼지 못하는 농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볼 일이다.

이번 설에는 우리 농인들도 같이 느끼고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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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칼럼리스트
한국농아인협회 사무처장으로 근무했다. 칼럼을 통해서 한국수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이 일상적인 삶속에서 겪게 되는 문제 또는 농인 관련 이슈에 대한 정책 및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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