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든가 군사부일체라는 말을 들어보기 참 힘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역시 스승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위대한 선생님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또 그러한 스승의 노력으로 인하여 지금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만난 선생님이 몇 분이십니까? 그 선생님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요?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12년이니 우선 열 두 분의 선생님이 있고, 대학에선 전공마다 다르지만 대학을 졸업했다고 치면 대충만 잡아도 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스무 분 이상의 선생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찾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자의 30% 가량이 자신의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찾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앞날이 밝습니다.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교통사고로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다리가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변도 못 보고 참곤 하였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소변을 참지 못해 교실에 앉은 채로 볼 일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늦게 오셨습니다.

수업이 끝나서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 청소를 하였는데, 책상을 교실 뒤편으로 쭉 밀어내고 교실 앞쪽을 쓸고 다시 책상을 앞쪽으로 밀고 쓸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꼼짝을 하지 않자 아이들이 청소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안아서 교실 앞쪽에 있는 선생님의 자리에 옮겨 앉혀 주었습니다. 그러자 내 의자는 젖어 있었고 아이들이 수군거리자 선생님은 ‘수업하느라 고생을 하였나 보다. 그래서 땀을 많이 흘렸나 보다.’라고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물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지도 많이 젖어 있었고 바닥도 젖어 있었는데 흰색 레이스로 장식된 선생님의 방석에 그대로 옮겨 앉혀 주었습니다.

중학교 때였습니다.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업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넘을 계획이었습니다. 어머니라 하더라도 힘이 들었을 테고 지쳐서 힘들게 가고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업힌 나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내어주었고 선생님은 나를 업고 큰 바위가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물론 가을의 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점심시간에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가벼워서 힘이 들지 않았다. 많이 먹고 건강해져서 선생님이 힘들었으면 좋겠다.’며 웃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수학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꿈을 알려 주었고 내가 하는 이야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주셨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그 때 만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 선생님은 항상 똑같은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친구들은 그 선생님에게 콜롬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만일 어느 누군가 그 선생님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내가 야단을 쳤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선생님은 기타를 잘 쳤고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사랑을 가르쳐 주었던 선생님도 있었고, 문학을 알게 해 준 선생님도 있었고, 장래 희망에 대하여 진지하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던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과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 불만족한 사람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일깨워 주셨던 선생님도, 비가 오는 날이면 수업은 하지 않고 가족 이야기를 통하여 새삼스레 부모님을 존경하게 만든 선생님, 내가 선물했던 은색의 반짝이는 빠이로트 105만년필을 가지고 지휘하면서 ‘바다로 가자’라는 노래를 알려 주었던 선생님도, 에밀 싱클레어의 어린시절 이야기 ‘데미안’을 선물하여 준, 그리하여 내가 책 읽는 습관을 가지게 한 선생님은 모두 나에게 귀한 스승들이었습니다. 나는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당시의 선생님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선생님.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