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006년 1월 뉴욕에서 열린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정을 위한 제7차 특별위원회 회의’에 옵저버(observer)로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회의의 최대 이슈는 여성조항을 단독으로 신설하는 문제였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국가들이 남녀를 구분하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여성조항 단독 신설 보다는 모든 조항에서 여성이 특별히 배려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중심이 되어 여성조항의 단독신설과 일반조항에 여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키는 이중구조방식(Twin Track)을 제안했으며, 이 제안이 힘을 얻어 최종 채택된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6조에 장애여성 관련 조항이 신설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애여성은 세계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까? 국제연합(UN)이 밝힌 장애여성의 현실을 살펴보면, 우선 UN은 장애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애와 성(gender)의 두 가지 렌즈를 활용해야 한다(Using both gender and disability lense)’고 말한다.

즉, 장애와 성(gender)은 그 자체만으로도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장애여성은 그러한 요소를 이중으로 가진 존재로서 이 두 가지 요소를 별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두 고려하여 장애여성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장애여성은 주거, 보건, 교육, 직업훈련, 고용 등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고 UN은 말한다. 특히 장애여성은 불평등한 고용과 승진, 교육과 재교육의 불합리한 처우, 임금의 불평등 등 기회의 불균형에 처해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로 새천년개발목표(MDG) 등에서는 양성평등과 여성의 역량강화를 주요 달성목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이들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사항임을 전제하면서 장애여성이 장애인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들을 동시에 겪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장애여성은 이중적 차별에 놓일 위험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고 성적․방임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일찍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해왔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장애인에 관한 세계행동계획(World Programme of Action concerning Disabled Persons)’과 ‘장애인의 기회균등에 관한 표준규칙(The Standard Rules on the Equalization of Opportunities for Persons with Disabilities)’에 여성 관련 내용을 담기도 했다.

‘제1차 아태장애인 10년’의 근간이 된 이 두 가지 행동목표는 이후 비와코 밀레니엄 프레임워크(BMF)로 이어졌고 지난해 완성된 인천전략에도 여성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장애여성 단독조항을 담고 있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까지 더한다면 국제연합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지난 30여 년간 장애여성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양성평등실현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은행(World Bank)보고서에 따르면 1분당 30명이 넘는 여성이 근로 중에 심각한 부상 혹은 장애를 입고 있고 그들 중 상당수가 간과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도 여성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두고 시각장애여성들의 사회참여와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국제장애인권리협약도 장애여성에 대한 조항을 포함하면서 여성 인권과 장애인 인권이 아닌 장애여성의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2006년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 장애여성조항을 단독조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나라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06년 이전부터 국내에서 여성조항을 단독조항으로 제정하기 위한 논의가 있었고 꾸준한 노력으로 여성조항에 대한 논의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정을 위한 제7차 특별위원회 회의에서도 EU를 중심으로 한 반대의견을 이겨내고 제6조에 여성조항을 단독으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최종적으로 우리는 승리했고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우리 장애인계는 여성조항, 아니 장애여성의 차별금지와 권익신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사실 필자가 우리 장애인계의 모든 일을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또 소리 없이 빛도 없이 장애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분들이 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여성조항의 단독조항 제정을 달성한 우리가 혹 당시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한다.

아직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많은 곳에서 장애여성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폭력과 학대에 노출된 장애여성의 숫자도 상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아직 장애여성의 사회참여는 미약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활동지원서비스 인정조사표에도 여성을 고려한 항목은 찾아보기 어렵다.

상당수의 장애인단체에서 활동하는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은 10%를 넘기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학력, 소득, 고용 등 모든 분야에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일부 장애여성들은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 사회의 관심 또한 높지 않다.

“안 된다”, “못하고 있다”고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선 활동지원서비스를 보자. 인정조사표 항목에서 장애여성과 남성 간의 변별력은 거의 없다.

시각장애여성은 독립보행 시 시각장애남성에 비해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외출에 있어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남성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사정을 배려하지 않는다. 인정조사표 자체에 여성을 배려하고 있지 않으니 서비스 내용에서도 기대할만한 것이 많지 않다. 활동지원급여를 받는 장애인 부부는 독거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정시간 급여가 삭감된다.

장애여성의 육아와 출산을 지원하는 지원정책이 나오고 있지만 그저 통장으로 지원금이 입금되는 형태가 대다수이다. 국가의 여성정책에 장애여성에 대한 배려가 없지는 않겠지만 종합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 장애인계는 여성조항의 단독조항 제정을 위해 노력하던 그때의 열정을 되찾아야 한다. 떼쓰고 졸라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와 주장으로 장애인의 복지·인권 그리고 장애여성을 배려하는 선진 장애인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장애가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 후손들이 장애로 인해 덜 고통 받길 바란다면, 장애가 더 이상 불편하고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한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우리의 모습을 국제 사회에 알릴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여성조항을 단독조항으로 제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은 장애인정책·장애여성정책에서도 역시 다르다.”라고…

우리가 국제사회에 이렇게 말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2006년 그 당시의 열정을 상기하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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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준 럼리스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국장이자 아시아태평양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 부회장이다. 제3차 아태장애인 10년을 위한 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유엔 에스캅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세계 장애인계의 동향, 뉴스를 소개하며 시사점을 살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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