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 나는 꿈이 참 많았다. 어느 날은 화가가 되겠다고 했다가 또 어느 날은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했다가 하루에도 꿈이 수 백 번씩 바뀌는, 그 또래 아이들처럼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경찰과 소방관이었다. 왜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때부터 나는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무언가 베풀며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두 직업이 얼마나 육체적인 직업인가를 알게 되었고 장래희망 목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나이가 들고, 내 장애의 상태를 알고 나서는 나는 장래희망을 최대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이동 범위가 크지 않은 선에서 찾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유독 내 눈에 띄는 직업은 문인, 화가 같은 창작 예술인들이었다.

학창시절 당시 TV에는 구족화가, 시인들이 눈에 들었고,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직업을 선택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림 그리는 것, 글 쓰는 것도 좋아했기에 그런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 미래는 나의 작은 집 안에서 해결 가능한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적어도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학에 진학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한 번에 뒤집어 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차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나의 일상은 고교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의 활동반경이 넓어졌다는 것과 만나는 사람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대학생활을 하며 내가 속한 단과대학을 벗어나 다른 단과대학으로 수업을 들으러 다니기도 하고 강의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게 됐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어서 전동휠체어를 쓸 수 없었다.(사실 우리나라에서 지체장애인 학생이 전동휠체어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던가.)

그래서 수동휠체어로 엄마가, 또는 시간이 맞으면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옮겨주고는 했는데, 문제는 수업이 끝난 후였다.

혼자서 강의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난생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내 휠체어를 맡겨야 했고, 그 누군가가 강의실을 나가기 직전 얼굴에 일명 철판을 깔고는

“저기요! 저 좀 데려다 주실래요?”라고 하는 수밖에.

그렇게 가깝게는 같은 과 선후배 동기에서 멀게는 처음 본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문턱과 계단뿐인 대학로 식당가를 누비면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에 자신감이 붙었다. 세상에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확신 말이다.

그리고 또 나에게 자극을 준 친구가 있다. 대학 동기였던 친구인데 그 친구도 나와 같은 장애를 갖고 있었다. 단거리와 계단 정도는 지팡이를 짚고 보행이 가능하다는 것만 나와 달랐고, 그 친구도 장거리는 나처럼 휠체어를 이용했었다.

내가 20여년을 살며 학교에서 처음 본 장애인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경험담을 듣거나 생활상을 지켜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굳이 집에서만 일할 필요는 없겠다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방구석에서 세상으로 불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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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때 시인을 꿈꿨으나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음과 더불어 작가는 엉덩이가 무거워야한다는 이야기에 겁먹고 문학인의 길을 포기.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여 예비사회복지사의 길과 자립생활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대한민국 평범한 20대 장애여성. 바퀴 위에 올라 앉아 내려다보고 올려다본 세상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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