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사회학과 클래스. ⓒ샘

12/9/2004

레이첼이 성형의 심리적 영향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사회학 190-9 정체성 클래스의 마지막 강의 시간이었다. 이제 이 프레젠테이션만 끝나면 이 클래스는 끝이 난다.

그리고 이 마지막 클래스는 내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제 하버칼리지 3년 버클리 2년 총 5년여의 힘든 내 학교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마치 난투극을 벌인 권투가 끝내 상대를 누이고 카운트 다운을 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드디어 프레센테이션이 끝나고 토론이 있은 후에 교수님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해냈다. 어느 곳하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1급 장애인의 몸에 학교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는 실력으로, 장애인의 인권 회복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피붙이 하나 없는 미국에 건너 와 천신만고 끝에 휠체어 하나 끌고 하버드에 이어 세계 2위라는 명문 버클리를 이렇게 마친 것이다. 그것도 미국 대학생 1%내의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내셔널 장학생, 인터내셔널 장학생, 버클리 사회학과 장학생, 클링턴 대통령이 받았던 골든 키 장학생이라는 큰 상들을 거두며…….

미국에서 펄펄 날 정도로 공부 잘 하던 학생들도 낙제의 고배를 마시고 돌아가는 일이 허다한 이 힘든 대학에서, 쓰디 쓴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내고 거둔 이 기절할 것 같은 짜릿한 희열을 누가 알까.

밖으로 나왔다. 겨울 여섯 시 쯤은 마냥 어둡다. 그 어둠 가운데 저 앞의 대학로 텔레그래프의 휘황한 불빛이 보인다. 평소에도 밝지만,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길 옆에는 수많은 등들이 켜져 더 더욱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쉬움 때문일까? 내 휠체어는 마냥 느렸다. 이제 다시 오지 못할 정든 학교,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호흡하고 싶어서.

학교 남문인 새터 게이트를 지나오며 나의 아쉬움은 극에 달했다. 지난 2년 동안 드나든 문이다. 워싱턴 디시,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다시 드나들기 쉽지 않을 것이다.

교문을 나서자 마자 야외 카페가 보인다. 많은 학생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하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pda를 꺼내 아쉬운 마음들을 털어 놓았다. 아아, 내 마음을 알기나 하듯 학교 시계탑인 캄파넬리에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부에 눌려 쓰러질 정도로 힘들 때, 위로처럼 울려대던 저 종소리도 이게 마지막이다. 은은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는 종탑이 신비롭게 보인다. 종탑 만이 아니다. 2년 동안 드나든 사회학과 배로우 홀 건물, 졸업식을 가졌던 젤라박, 장학생 시상식이 있었던 홀, 그리고 학교 장애인 오피스, 그 건물들을 하나하나 훑듯이 지켜 보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52번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유니버시티 애브뉴로 들어섰다. 이제 학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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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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