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디시 전경(출처: 구글이미). ⓒ샘

8/2/04

이제 이 곳 상원에 근무하는 날이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은 오후 근무만 할 예정이고, 모레 수요일에는 작별 인사만 하고 일찍 돌아갈 예정이기 때문에 실상은 몇 시간도 되지 않는다.

이제 남은 일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자료를 정리해 Mary 변호사에게 보내면 된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짐을 정리해 가지고 다음 주에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잔뜩 긴장해 이 곳에 들어온 지가 어제 같은 데 벌써 두 달이 훨씬 넘었다니. washington DC에서의 두 달이 넘는 생활은 여러 모로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지난 5월 22일, 장애의 몸을 이끌고 처음으로 혼자 타지로 떠나는 나를 가족과 친지들은 몹시 걱정하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시간에 쫓겨 작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시끄러운 비행기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못들고 피곤한 몸으로 둘러스 공항에 내렸었다.

한국을 떠나온 후 오랫 동안 맛보지 못했던 따가운 햇빛과 후끈한 공기,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기대감에 얼마나 가슴이 부풀었던지. 그리고 다소의 모험이 따를거라는 스릴이 따거운 햇살만큼이나 나를 달구고 있었다.

8/4/2004

마지막 퇴근을 앞두고 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담뿍 든 사무실이다. 낯익은 책상과 컴퓨터들, 그리고 수북히 쌓여 있는 서류들. 더욱 정이 든 것은 좋은 사람들이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떠나게 된다.

내 앞으로 보내진 업무용 이메일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이 사무실에서의 의미있던 시간들이 하나 하나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8/5/2004

냉동실을 열어 보니 아내가 놓고간 생오징어가 있었다. 음식을 해서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꺼내서 뜨거운 물에 녹여 만지니까 손에 닿는 촉감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그냥 집어 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계속 씻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 졌다. 미끈미끈한 촉감이 이제는 싫지가 않게 느껴진다. 사람은 이렇게 익숙해져 가는 동물인가 보다.

8/6/2004

내일 워싱턴을 떠난다. 마지막 빨래를 하면서 죠셉이 동전 좀 달라고 한다. 가방을 뒤져 동전을 찾아 주었더니 지폐를 내민다. 나는 안 받겠다고 우기고 죠셉은 줘야 겠다고 우기느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그 거 받지 않으면 나 기분 상해."

죠셉이 말했다.

"너도 이것 나 주면 나도 기분 상해."

둘은 한참을 실랑이를 하나 결국엔 농담의 수위가 높아졌다.

"그래 그까짓 1달러 때문에 두 달 반의 우정을 부숴 버리자는 이야기지?"

"그래 좋아, 여자 문제도 아니고 돈 때문에 그렇게 좋았던 관계가 무너 졌군."

둘은 한 바탕 웃었다. 결국엔 내가 돈을 받았고 대신 나는 제안을 했다. 나도 그에게 다른 1달러 짜리 지폐를 주고 서로 사인해서 돈을 쓰지 말고 보관하자고. 나는 그에게 "God bless you"라고 썼고, 그는 나에게 "My good friend"이라고 써서 건네 주었다.

우리는 워싱턴을 떠나면서 마지막 일로 서로의 돈을 모아 함께 나가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주고 돌아 왔다. 뿌듯했다.

그 동안 참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른 인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간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아무런 문제 없이 끝까지 잘 지냈다.

시각 장애인인 그는 지체 장애인인 나를 참 많이도 도왔다. 나도 그를 도우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그는 내게 훨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오면 항상 밥을 지어 놓았고, 내가 아침에 시간이 없어 못하고 간 설겆이도 깔끔하게 해 놓곤했다. 내가 손이 닿지 않을까봐 옷걸이도 길게 내려서 걸어 주고 문을 닫기 쉽도록 문에 줄을 달아 매는 세심함도 보였다. 나는 나름대로 그가 심한 약시이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를 읽어 주거나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몹시도 고마워했다. 그렇게 서로 도우면서 지나간 두 달 반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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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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