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하버 풍경(출처: 구글 이미지).ⓒ샘

7/26/2004

건조한 영화에 씁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오는데 비가 뿌리고 있었다. 좀 무리하면 십분 밖에 안 걸리는 집까지 갈 수는 있겠지만, 한번 쯤 치기를 부려봐도 좋겠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워싱턴 하버로 향했다.

강가로 향한 상점은 아쉽게도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커피 전문점이면 좋겠는데… … . 따뜻한 것이 그리워 핫초코라도 있느냐고 물으니까 점원 아가씨가 고개를 젖는다. 하긴 아이스크림 가게에 와서 따뜻한 것을 찾으니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쉐이크를 받아가지고 창가에 앉았다. 어두워진 탓에 강은 보이지가 않는다. 비 때문인지 평소에 보이던 유람선들의 불빛도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불빛은 무수히 많다. 강건너로 보이는 다리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 한참 훌륭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을 케네디 센터에서 비춰오고 있는 불빛, 그리고 점포 바로 아래에 크게 펼쳐져 있는 연못 중앙에서 화려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의 오색 불빛들.

이런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꼭 저렇게 방정맞은 음악을 틀어야 하는 걸까. 게다가 몇 명 안 되는 손님들도 춤추고 재잘거리고…….

나는 그네들의 밝은 분위기에 전혀 동화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로 가라앉아 갔다.

그래도 좋다. 밖에 있으면 필시 젖고 말 그 비를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안온함이 좋다. 지금 이 순간, 이 환경, 이 절대적 일회성이 숨막히게 좋다. 나이도 잊었다. 어려운 상황들도, 복잡한 일상들도 모두 잊었다. 사회의 일윈이라는 하나의 톱니 바퀴 의식도 물려 놓았다. 심지어는 늘 내마음에 자리해 있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식도, 글 쓰는 이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도 없다. 그냥 이 밤에 이 다름다움 속에서 명료하게 저 어둠과 빛을 의식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숨막히게 환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철저하게 사치스럽자. 한번 쯤은.

워싱턴 디시는 짧은 비로 유명하다. 아무리 거세게 퍼부어도 잠시만 피해 있으면 금새 그쳐버리고 만다. 그런데 오늘 비는 좀 길게 내리고 있다. 좀 늦어도 괜찮다. 아예 밤새 내려도 좋겠다. 가게 문 닫으면 처마에 서서 내일 밝아오는 해를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정말 한번 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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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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