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에서 인턴들에게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한 작가. ⓒ샘

상의할 것이 있다는 매리 변호사의 연락을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년에 법제화되도록 추진할건데 내용은……."

그녀가 제법 두꺼운 문서들을 내밀며 말했다. 내용을 대충 얘기한 다음에 그녀는 말했다.

"페이퍼 좀 깨끗이 정리하지."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갔다. 페이퍼는 타이핑된 초고 위에 볼펜으로 수없이 쓰고 고쳐 읽기조차 쉽지 않았다.

상원에 법 제정을 요청하는 페이퍼를 이렇게 지저분하게 만들어 보내다니. 아이오와 주민이 보낸 그 페이퍼로 보아 나는 몇 가지 그 사람에 대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든 가난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기가 쓴 글을 아는 사람에게 타이핑을 부탁했을 테고, 타이핑된 문서에서 고쳐야 될 부분이 거듭 발견돼 볼펜으로 수정을 한 다음에 다시 타이핑을 하는 데 돈이 더 들거나 부탁하기 미안해서 그냥 보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상원 사무실에는 수도 없이 많은 우편물이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한 시간만 체크를 안해도 팩스에는 수북이 종이가 쌓인다.

상원에 보내는 것인만큼 대부분이 설득력이 있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많은 우편물이나 팩스된 안건 중에 그렇게 지저분한 것은 흔치가 않다. 그런 읽기 힘든 지저분한 페이퍼는 버려지기 십상일텐데 변호사는 아주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정연한 논리나 그럴싸한 배경 없이도 사안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해 작은 목소리를 듣는 그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은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니다. 미국 사회는 도처에 작은 목소리가 들리도록 되어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불평할 것이 있으면 수퍼바이저를 찾으라고 한다. 불만이 있어 상대하고 있거나 다투고 있는 일의 해결이 원만치 않으면 수퍼바이저를 불러 사실을 이야기 하면 다는 아니지만 자기의 불만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꽤 많다.

미국에는 재활국이 있어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남가주의 리돈도 비치 사무실에는 나의 자립을 도와온 장애인 스페셜리스트인 엘리자베스가 근무하고 있다. 그녀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그녀가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상담하는 사람이 불만이 있으면 무조건 수퍼바이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고 했다.

"그러면 항상 엘리자베스가 이기겠지요?"

나를 도와주고 있는 동안 한 번도 실수한 일이 없고, 모든 일을 철저하게 해내는 그녀의 완벽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있게 물었다.

"그 반대예요."

"반대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일을 해내는데도 고객편을 들어 주다니.

"거의 고객편을 들어줘요. 그네들이 확실히 잘못했는데도……."

그런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 별로 깊은 불평 같은 것이 없다. 자기가 지더라도 다소 억지가 있더라도 그네들의 재활에 대한 사기를 꺾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 짐작해 본다. 내가 하나하나 성공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을 자기일보다 더 기뻐하던 그녀였으니까.

하나의 예가 더 있다.

아내가 옷을 잘 못 사와 물러달라고 찾아 갔다. 대부분은 아무말 없이 돌려주는데 매장 아가씨가 생선 냄새가 난다며 냄새를 제거해 가지고 오라고 한다. 아내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생선 냄새라는 것에는 은근히 인종차별적인 성격이 담겨있다. 미국인들에게는 동양인의 김치 냄새나 생선 냄새가 싫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옷에서는 생선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입지도 않은 옷에서 어떻게 생선 냄새가 난단 말인가. 옷을 들고 나오던 아내는 안되겠다 싶어 그 옷을 다른 백인 직원에게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는 수퍼바이저를 불렀다. 수퍼바이저에게 또 한 번 물었다. 그 또한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수퍼바이저는 당장 돈을 돌려주라고 매장 아가씨에게 말했다.

자기 매장에 소속된 사람이기 때문에 편들어 주어야 한다는 단편적인 이기주의가 아닌 고객이 정당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정당한 것에 대한 그런 작은 승리가 있기 때문에 고객들은 살 맛이 나는 것이다.

어느 선배의 말이 기억난다. 한국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기'가 막혀있어서 문제라고.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나라가 발전했지만 아직 작은 목소리를 듣는 데는 미흡하다.

우리 나라가 살려면 곳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 작은 소리에 담겨 있는 진실과 창의성과 다양성이 활기차게 수용되어야만 좋은 나라가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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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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