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아 이번에 만나면 다른데 가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자. 나 좀 도와줄수 있어?

언제나처럼 만나기 일주일 전에 데이트 계획을 생각해 둔 그녀는 이번 데이트 장소를자신의 집으로 결정했다. 평일에는 회사 생활, 주말에는 나와의 데이트 때문에 항상 설거지 빨래 등의 집안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해 왔었고, 무엇보다 더운 날씨에 내가 지칠 것도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글쌔 내가 너를 도와줄 일이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 대신 “도와줄래?” 라는 말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항상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기에 내가 누구에게 보탬이 된다는 것은 그저 희망사항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때였기에 반가운 마음도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너에게 피해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간절한 바램(?) 이 밀려왔다.

드디어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우리는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여자친구의 자취방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세탁기를 돌리면서 자신이 나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속옷이나 다른 것들은 제외하고 수건이나 양말, 티셔츠 등의 정리를 부탁했다.

각종 빨래며 집안 정리 등에 동분서주하는 그녀와 달리 집에서나 밖에서도 수건 한 장, 양말 한 짝 개어 놓는 방법을 몰랐던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배웠던 설거지 뿐이었다.

집 안에 있던 양말이며 수건 등을 제대로 정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마루에 있던 수건만을 만지작거리기를 몇 분, 청소기를 돌리려다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살짝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너한테 크게 도와달라고 한 것은 아닌데, 빨래 개어 본 적 없니? 나는 네가 다리만 불편할 뿐, 다른 것은 비장애인들하고 똑같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할 마음이 없는 거니? 아님 혹시 방법을 모르는 거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도 청년부로 올라가면서 각종 수련회에 참석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그때마다 옷을 개별적으로 세탁하는 문제는 항상 골치덩어리였다.

다른 이들은 가정이나 군대, 혹은 또래들을 통해 배우게 되지만, 나는 늘 “ 저 아이는 몸이 아프니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는 말이 먼저였다. 처음에는 민망하고 미안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의존적으로 변하다 보니, 결국 그녀도 도와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방법을 몰랐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니 왜 알아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 미안하지만 난 정말로 방법을 몰라. 알려줄 수 있어?

내 말에 그녀는 하던 일을 맘추고 “ 내가 애기 더 키우게 된 거 아냐” 며 투정을 하더니, 곧바로 빨래를 개어 놓는 방법이며, 방을 청소할 때 주의할 점 그리고 양말 등을 빨아서 말리는 것 등을 알려주었다.

그 이후로도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집안일을 하는 데도 많은 보탬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장애이기 때문에 못 한다고 치부하지 않고,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지금도 고마운 이유다.

시행 착오는 많겠지만 부모의 사후를 대비해 멀리 보고 알려줘야

“ 내가 죽으면 네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 걱정이다”는 말은 나를 포함한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또한 성인이 된 장애 자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 마음씨 좋은 사람이 우리 애를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의 신체적인 장애는 인정했으나 그로 인해 다른 집안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그것 때문에 서운한 마음을 보이며 하나하나 다시 알려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부모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장애인인 자녀가 혼자 남을 경우를 대비하여 집안일, 혹은 기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이나, 각종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등을 미리 알려주고, 하나하나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애 자녀를 위한 큰 선물 중 하나임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최근 암 등의 각종 위험을 보장한다는 보험이 화제다. 그렇다면 장애인인 자녀에게는자립생활의 기틀을 마련해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배아파 낳은 부모만큼, 장애 자녀에게관심을 기울일 형제들이 극히 드문 현실에서 자립이야말로 “ 부모 사후를 대비한 안심보험” 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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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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