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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 눈 My Left Eye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1-04-11 08:42:31
“우안右眼 실명입니다.
시각장애 6등급에 해당합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축구열기가 한참 달아오를 무렵 여의도의 한 안과병원 진료실. 안과의사는 진료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의 오른 쪽 눈이 완전히 실명되었고 장애등급이 6등급이라는 의학적인 선언이다. 충격적인 내용을 듣고도 나는 전혀 놀라거나 혼란스러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수년 전부터 오른쪽 눈으로는 명암 구분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그날 병원진료는 단지 의학적으로 확인 받기 위한 통과의례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병원을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나의 왼 눈에 KBS별관이 들어왔다. 공개방송이 있는지 젊은 학생들이 길게 늘어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행원인 듯한 유니폼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이른 점심을 마치고 삼삼오오 길을 건넌다. 깔깔거리며 담소하는 젊음의 모습은 비록 외눈으로 쳐다보는 내게도 싱그럽게 다가온다. 한 중년 사내의 실명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혀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오며 새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가을빛이 완연해진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평화롭다. 비록 의사의 선언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가슴속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잔잔한 흔들림은 있었다. 그것은 충격도 아니었고 슬픔은 더구나 아니었으며 오히려 어떤 후련함 같은 것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좌절 속에서도 행여 실낱같은 기적이라도 생길까 기도와 기대를 했었지만 결국 오른 눈 완전실명의 선고를 받고나니 차라리 속이 시원한 느낌까지 드는 것이다. 의사가 발급해 준 장애진단서는 평생 나를 옭아매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통보서였던 것이다.

눈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한참 사춘기 때인 중학생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인가 오른쪽 눈이 마치 동굴 속에 들어온 듯 어둡고 침침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인 아들의 손을 붙잡고 서울의 유명한 안과는 모두 순례했다. 한결같은 진단결과는 오른 쪽 눈의 시신경이 말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으며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의사들의 통보에 아버지는 절망했다. 각막처럼 신경이식방법을 물었지만 세계 어느 병원에서도 신경이식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고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다니면서 상태는 더욱 더 나빠졌다. 예민한 사춘기와 패기 넘쳐야 할 대학시절을 힘들게 보내야만했지만 나는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대학진학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원하지 않은 가출까지 해야 했던 나는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오로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버는 것이었다. 비록 세시봉의 친구들처럼 뛰어난 소질은 없었지만 노래는 내 젊은 날의 비상탈출구였다.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고 나는 원하던 방송사 PD가 되었다. 대학 전공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내 직업에 나는 완벽히 만족해했고 행복했다. 하지만 내게 그토록 뿌듯한 성취감을 주던 직업은 나의 육체적인 조건에는 최악이었다. TV-PD라는 직업은 많은 시간을 눈부신 조명아래 작업해야하는 고된 노동을 수반한다. 녹화를 마치면 몇날 며칠을 날 새는 줄 모르고 모니터를 보며 편집에 매달려야 했다. 완성된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 마지막 타이틀 롤 자막의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는 그 순간, 비록 가혹한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창조적이고 문화적인 열매는 달고도 뿌듯했지만 나의 부실한 오른 쪽 눈은 물론 건강한 왼쪽 눈마저 혹독하고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루 종일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 세끼를 해결하고 쪽방 같은 편집실에서 작업하다보면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고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작업을 마치고 모처럼 밖으로 외출하면 이번에는 태양이 나를 괴롭혔다. 강렬한 햇살은 편집에 시달린 내 눈을 수 천 개의 날카로운 가시로 집요하게 찔러댔다. 짙은 선글라스로 햇볕을 차단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눈동자가 뻑뻑하고 고통에 시달렸다.

현업PD로서의 전성기인 삼십대 후반에 내 오른 쪽 눈은 이미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쪽 시력의 불균형과 무리한 시각노동으로 인해 겪어야하는 고통이 너무 힘든 나머지 차라리 한쪽 눈이 아예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였다. 안과의사는 내게 이제라도 직업을 바꾸고 눈을 쉬게 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충고를 했다. 나는 고민했지만 TV영상으로 맺어지는, 내 상상력의 열매를 가꾸는 매력적인 직업을 중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육체적 고통은 내가 감내해야만 했던 심적인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른쪽 눈이 거의 제구실을 못하므로 왼쪽 하나의 눈만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는데 사내 직위가 높아지면서 현업의 부담이 줄어들어 일상적인 업무는 그런대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며 내게 참담한 좌절을 안겨주곤 했다. 나는 골프를 매우 늦은 오십에 시작했지만 사실은 삼십대 후반에 시작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회사 동료들과 처음 골프채를 들고 휘둘렀는데 이상하게도 공을 맞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맞추는데 나는 아무리 겨냥하고 휘둘러도 헛스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외눈으로는 거리감이 정확치 못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골프채를 던져버렸다.

내가 다시 골프를 시작한 것은 쉰의 나이에 들어서며 관리보직을 놓으면서부터였다. 늦었지만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골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연습장을 찾았더니 이십대를 갓 넘긴 알량한 티칭프로라는 청년이 내 자존심을 여지없이 건드리는 것이었다. 내 한 쪽 눈의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스윙을 지켜 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선생님은 골프를 치면 안 되겠네요. 그냥 달리기 운동을 하시지요.”

녀석의 한 마디는 내 오기를 건드렸고 매일 새벽 혼자서 두 시간씩 연습장에서 살았다. 문제가 되었던 거리감도 웬만큼 적응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필드 라운딩을 한 덕분에 실력은 초스피드로 발전해서 단기간에 80대 중반까지 핸디를 줄일 수 있었다. 그나마 골프나 당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놓여있는 공을 치는 것이므로 나은 편이다. 탁구처럼 빨리 움직이는 공을 맞춰야하는 운동은 나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호에 따르는 운동은 신체적인 조건이 안 맞으면 그만두면 그 뿐이다. 일상 업무, 대인관계에서 나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내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내 가슴속에 평생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되었다.

비록 시력은 계속 나빠졌지만 젊었을 때는 외견상으로 크게 이상이 없었다. 남들이 눈치 챌까 늘 노심초사 하면서도 대인관계에서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정점을 넘어서고 육체적 활력과 세포의 재생력이 예전 같지 않아지면서 서서히 예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아침시각에는 그나마 에너지가 충분해서 그런지 별로 모르겠는데 피곤한 오후로 접어들면 시력이 없는 오른쪽 눈꺼풀이 내려앉으면서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내게만 불편한 게 아니라 나를 보는 상대에게도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을 양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눈의 외형적인 불편함에도 전혀 기색 없이 나를 자연스레 마주보며 대해주는 사람들과 나와 대화 중에도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고 외면한 채 다른 곳을 보며 말하는 사람들이다. 앞의 사람들이나 뒤의 사람들이나 모두 나름대로 남을 위한 배려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인데 마주하는 나로서는 앞의 사람들에게 훨씬 고마움을 느낀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상대의 성향을 동물적으로 파악한다. 앞의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지 고마움과 함께 자연스레 호의로 대해주게끔 되고 뒤의 사람들에게는 미안함과 더불어 좀처럼 속마음을 열지 못하고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은 내 가족들은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2002년 의사로부터 공식통보를 받고서 3년 후에야 나는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로서는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자못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내는 물론 아들과 딸도 엉뚱한 소리라는 듯이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병원에서 받은 장애 확인증까지 보였지만 그래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다. 심각하게 얘기를 꺼낸 내가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아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했다. “그러면 소요산에서 온양온천까지 지하철이 공짜 아냐? 좋겠네. 하하하” 이처럼 나의 장애를 인정하려 조차 않는 가족의 사랑이 내게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의학적으로 완전 실명선고를 받고서도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다가 퇴직 무렵에야 했다. 동사무소에서 발급한 복지카드를 받긴 했지만 한 동안 지하철 등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타보려고 입구센서에 카드를 댔다가 “우대카드입니다”라는 기계음에 기겁을 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낯이 뜨거워졌었다. 그 후 복지카드를 일체 사용하지 않다가 그 몇 달 후부터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복지카드 기계음에 대한 장애인들의 불만을 인식한 정부가 소리를 없앴기 때문이다.

정상인의 카드는 '삐~'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리지만 복지카드를 대면 두 번 짧게 울린다. 아마도 정상카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신호음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구분하려는 관심조차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장애인이 된 후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 소리가 정확히 구분되어 들리게 되었다. 가끔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두 번 울림이 들리면 나는 유심히 그를 쳐다보게 된다. 저 사람은 남모를 어떤 장애를 가지고 아픔을 숨기며 살아갈까 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이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대신에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얻게 된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서 마음의 장애까지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TV에서 장애자들이 그저 더도 말고 보통사람들처럼 대해주기만을 바라는 것을 공감하면서 내게 보통사람처럼 대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과 그들에 대한 방어본능이 그동안 나도 모르게 편협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온전히 나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나보다 심각한 장애를 갖고도 의연한 인격과 부단한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 2002년 의사로부터 선고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유사한 자유로움이다. 평생을 옥죄고 있던 열등감과 자폐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이제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동성애자라는 천형을 받고 마음고생을 하다가 커밍아웃으로 영혼의 자유를 찾은 방송인 홍석천의 심경이 지금의 내 심정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홍석천이 들으면 그까짓 한 쪽 실명으로 어찌 자신의 아픔과 비교하려 하느냐 하겠지만 나로서는 평생 말 못하고 겪어온 내 마음고생도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던 아픈 진실을 열린 세상에 털어놓으며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자유를 얻었다고는 하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나는 여전히 왼눈으로만 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육체의 불편을 밝히게 되면서 마음의 불행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마음의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이제 모든 이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개의치 않고 따뜻하고 떳떳하게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거의 평생 동안 둘이 나눠져야 할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고생한 나의 왼 눈에게 감사한다. 고마운 왼 눈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두 눈으로 보는 이상으로 마음의 시야를 넓히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협함 없이 따뜻한 이해와 호의를 보이며 살고 싶다. 비록 뜻이 그렇더라도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의지는 각별하다. 자신의 뜻을 세우고 그대로 완벽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뿐이다. 감히 특별한 반열에 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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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박흥영 (hyp3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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