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도약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연극의 첫 장은 늘 그런 도약으로 시작된다. 내 첫 도약은 대학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던 나약한 소녀가 대학교에 들어와 혼자 휠체어를 밀고, 영어로 된 수업을 듣고, 운전면허를 따고,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평범한 여대생이 되었다.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이겨낸 인간승리의 주인공으로 박수를 받고 소녀는 무대에서 내려온다. 연극은 이렇게 끝났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첫 도약 이후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할 수 없는 많은 일들로 고민하는 나약한 소녀였다. 장애를 가진 나 자신을 여전히 부끄러워 해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이야기할 때 어려움을 느꼈고, 감정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고, 전신 거울로 내 몸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많은 것을 혼자 하게 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상 스스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해온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대학교에 오고, 취업을 유예한 상태로 대학원까지 왔다.

학부 5년, 대학원 2년. 7년째 같은 캠퍼스를 거닐다 문득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삶이 연극이라면 행인3 혹은 관객 쯤으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도약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한 장애인 극단에서 여배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가진 것이라곤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의지 뿐이었는데, 오디션을 봤고 운좋게도 '연극의' 주인공을 맡게 되었다.

피겨스케이터였던 한 소녀가 사고로 장애를 입게 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살다가 글쓰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로, 나는 주인공 소녀인 '루이즈' 역을 맡았다. 루이즈의 삶이 내 삶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연극=대본 및 동선 암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연극은 처음이었지만 잘 할 수 있을꺼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다.

연극 리허설 중. 이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펑펑 울었어야 하는데, 공연 막바지까지 울지 못했다. (출처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연극의 알파벳부터 새로 배우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발음, 발성, 호흡, 감정 표현, 상대 배우와의 호흡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었으니, 매일 지적과 훈계의 연속이었다. 명문대에 입학하고 늘 '잘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연극 연습실에서는 '못한다' '형편없다' '나아진 것이 없다'는 말을 매일같이 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나대지마, 나대면 더 추해" 세상이 쑥덕대는 소리, 정확하게는 세상이 쑥덕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소리를 의식했다.

하지만 무대의 루이즈는 크게 소리지르고, 크게 웃고, 크게 화를 낼 줄 아는 소녀였다. 그리고 연극 무대는 확실하고 강한 액션을 취해야 캐릭터가 살아나는 곳이었다.

무대에서 루이즈가 되기 위해 문영민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했다. 크게 울지 못하는 나를 위해, 사람들은 일부러 내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먹이기도 했고, 촛불만을 켜둔 어두운 연습실에 나를 남겨두기도 했다.

처음 한 달 정도 대본 리딩을 하며 작게나마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차에, 동작과 동선을 익히는 스탠딩 연습이 시작됐다. 어느 날인가 연습실 한 쪽 벽에 붙여진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보았는데, 어색하고 추해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연기에 몰입하려고 하면 어색한 내 모습이 머리 속에서 리플레이 되어 연습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 때까지 잡아놓았던 감정과 호흡들이 전부 무너졌다. 더 예쁘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구하라고 말하고는 도망가고 싶었다. 그 때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어보라고 말했다. 물론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전신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바라볼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용기조차 없으면서 어떻게 관객들에게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연습실에서의 연습이 끝나고,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리허설을 하기 전까지 나는 결국 거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다. 누군가 캠코더로 연습 장면을 찍어놓았는데, 그 영상을 볼 수도 없었다. 결국 연습 마지막까지 내가 연기하고 있는 루이즈라는 인물과 당당하게 마주하지 못한 것이다.

정기공연 전 날, 연출 선생님은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공연을 통해 루이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 그 순간 펑펑 울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루이즈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펑펑 울 수 있게 될까. 드디어 10월 1일부터 31일까지 이어진 정기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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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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