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좋아졌다고 하지만 장애인의 권리를 찾으려면 얼마나 더 세상과 부딪쳐야 할까? ⓒ코레일

청량리역에서

4월 28일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차를 탔다. 기차는 서울에 일이 있을 때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다. 장애가 심한 나로선 자가운전과 버스이용은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기차는 유일하게 혼자 이용이 가능한 교통수단이다. 요즘 날씨가 워낙 안 좋지만 그날도 역시 날이 많이 안 좋았다. 그래서 볼일을 끝마치지도 못한 상황에서 좀 일찍 길을 나섰다.

18시 차가 있는 걸 알고 그 기차를 이용하려고 16시 40분 쯤 목동에서 출발했고 차가 조금 밀려서 17시40분쯤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기차의 내부화장실은 보호자가 있어도 이용이 어렵기에 부리나케 화장실에 들렀다. 바우처를 찍고 나니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러야 했다.

17시 50분쯤 표를 샀는데 매표소에선 아무 제지 없이 장애인 표로 내어 주었다. 플랫폼에 내려가기 위해 공익요원을 요청했으나 공익요원들의 교대시간이라고 했다. 공익요원이 없어 표를 끊어 주었던 매표소 직원이 플랫폼까지 내려다 주었고 나를 기차에 태우기 위해 승무원을 찾았다.

탈 수 없다, 타야겠다는 실랑이

그런데 기차를 타려니까 승무원 아저씨가 안 된다고 제지를 했다. 휠체어 좌석이 아니어서 못 태운다는 것이었다. 휠체어 좌석이 아니어도 기차를 혼자 타고 다녔던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아저씨가 저 업어서 태우면 되고 휠체어는 접어서 놓으면 됩니다”라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두 아저씨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타려는 의지를 꺾지 않자 승무원이 “화장실이 장애인화장실이 아니기 때문에 탈 수 없다”고 했다. “이미 화장실에 다녀왔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태워 달라고 했는데도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된다, 안 된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한 3분 정도 실랑이하다가 도저히 안 태워줄 것 같은 분위기여서 탑승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역사로 올라왔으나 1시간을 혼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활동보조인을 빨리 불러야 했다. 그 활동보조인이 전철을 탔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기에 서둘러 전화를 하고 나니 매표소 직원이 기차표를 19시 발차 표로 바꿔주었다. 화가 많이 나는데다 지쳐 있던 나로서는 그나마 활동보조인의 케어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바우처를 1시간을 더 찍고, 다시 불러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활동보조인과 남은 1시간동안 밥이나 먹자 싶어서 구내식당으로 가 저녁을 사먹었다.

기차 사정 봐가면서 타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18시면 사람들이 한창 활동할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그 시간에 장애인들은 활동하지 말라는 건지, 장애인석이 있는 차량도 배치하지 않다니! 그리고 당사자가 괜찮다고 케어는 필요 없으니 태워만 달라는데 왜 태워주지 않았을까? 보호자 동반해서 갔을 땐 탑승에 문제가 없었는데 왜 혼자 가니 안 태워 줬을까? ‘화장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기차 안 장애인 화장실 어차피 못 가는 구만) 왜 승차를 거부했을까?

사람이 기차를 골라 타야 되는 건데 기차 사정 봐가면서 타야 되나 싶어서 분하고 억울했다. 달랑 2개 있는 장애인석, 그것조차 없애나 싶어서 짜증도 났다. 언어장애가 없었으면 더 싸웠을 텐데 말하기도 힘들고 그 사람들도 못 알아듣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더 따지고 권리를 쟁취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화가 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어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에게 무기가 될 수도 있으련만 언어장애가 심한 나로선 혼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장애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바깥 활동이 많아진 날 보고 부모님과 주위사람들은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사실 많이 좋아지긴 했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을 하고 다니니까. 하지만 근본적인 건 아직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장애인을 같은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건 너무 빠른 기대일까? 뭐, 나 자신도 스스로를 아직 같은 사람으로 느끼진 않으니까, 빨리 포기하고 내가 조금 참으면 되지, 이런 게 많으니까. 나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면 얼마나 더 세상과 부딪쳐야 할까? 답 없는 생각이지만 차창 밖으로 스치는 야경과 함께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칼럼니스트 김지현은 강원도와 서울을 한달에도 수차례 왕복하며 자립생활을 도모하고 있는 장애여성입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장애여성은 장애남성과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장애여성 안에도 다양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한다. "같은 생각, 다른 목소리"에서는 장애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해 조금씩 다른 목소리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장애여성의 차이와 다양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이제까지 익숙해 있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