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식 때 답사하는 모습. ⓒ김빛나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사람 두 명 이상 모이기만 하면 나는 앞에 나서서 동화구연이나 웅변 등을 하였다. 심지어는 여름휴가 때 해운대 바닷가에 놀러 가서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도록 부모님께서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다. 그리고 날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는 ‘장기자랑’을 하는 무대를 만들어 주시고 나의 꿈을 키워주셨다.

언젠가부터 나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새 학기가 되어 새 가방과 새 학용품을 사게 되면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정성스럽게 ‘김빛나 아나운서님’이라고 써주셨다. 아나운서는 어머니의 못 이룬 꿈이셨기에 딸인 내가 대신 이뤄주길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그런 기대가 싫지 않았다.

학창시절, 나는 특별활동시간을‘학교 방송국’에서 보냈다. 무엇보다 조명을 받으며 여러 대의 카메라가 나를 비추고, 그것이 많은 학우들에게 전해진다니 그 즐거움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어 학교 행사에서 진행을 맡기도 했다. 한 번은 길을 가다가 어떤 아주머니께서 나를 불러 세우셨다.

“혹시 네가 어제 oo학교 학예회에서 사회 봤던 김빛나 맞니?”

“네, 그런데, 왜요?”

“우리 애가 그 학교 다녀서 어제 갔는데, 사회 너무 잘 보더라.”

“네! 고맙습니다!!”

겸연쩍은 듯, 뒤돌아섰지만, 그 날은 내가 우리 동네 스타가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J.net '난장판' 6회 '우리들의 행진' 중에서...ⓒ김빛나

뇌종양 수술 후, 장애를 입게 되면서 나는 실어증까지 오게 되었다. 수술 후 충격으로 말을 잃고 한 달 만에 입을 열게 되었다. 인어 공주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어눌해진 발음만 남아 있었다. 사태파악을 하신 어머니께서는 국어 교과서의 시를 날마다 외우게 하셨다. 겨우 한 달 동안 말을 못했을 뿐인데, 발음은 쉽사리 교정되지 않았다. 그냥 단념하고 살고 싶기도 했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에 끈임 없이 노력한 결과, 조금씩 차도가 보이고, 현재 의사소통에는 불편이 없을 정도로 상태는 호전되었다.

장애를 입었는데도 아나운서의 기질은 버리지 못했는지, 나는 아직도 방송 타는 일을 매우 좋아한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오래 되면서 라디오 듣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 채택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라디오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장애인 방송인 윤선아씨의 방송을 알게 되었고, 나도 장애를 가졌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6년 EBS TV 죽마고우, MBC TV 더불어 좋은 세상 등 4~5편의 방송에서 주인공으로 내 이야기를 하거나, 패널로 출연해 주제에 맞는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가을, 아는 언니의 소개로 JnetTV(제이넷티비) ‘난장판’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장애인 인터넷 방송국인 제이넷티비는 몇 번 들어보았지만, ‘난장판’이라는 프로그램은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워낙 방송 타는 일을 좋아하는 지라 단박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홈페이지에서 전에 했던 방송들을 보았다. ‘난장판’이라는 프로그램은 매 회마다 다른 주제로 4명의 장애인, 비장애인 패널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 형식이었다. 전 방송을 보고 나니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오랜만에 촬영을 하는 거라 생각보다 매우 떨렸다. ‘내가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달리 모두 비슷한 나이 또래의 대학생인 친구들은 ‘장애’라는 공통점으로 빨리 친해졌고, 함께 정보도 공유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되면서 촬영했던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찾은 제이넷티비 홈페이지에서 촬영했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저 때 저렇게 했구나’ ‘어머! 저 때는 왜 그랬지?’ 혼자 깔깔 거리며 웃기도 하고, 더러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연예인들이 방송을 촬영하고, 모니터를 하는 마음으로 촬영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 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다음에 다시 촬영할 기회가 생기면 그런 실수는 번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꿈은 여러 번 바뀐다고 말한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모두 나태한 어른들의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꿈이란 자신이 처해진 환경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나 역시 음악을 전공하고, 또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되면서 어릴 적의 꿈은 잊고 있었다. 이번 칼럼을 준비하면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정리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3월이 시작된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3월은 새해와는 달리, 새로 시작하는 느낌을 준다. 학생들은 입학 하고, 새 학기를 맞게 되고, 많은 회사들은 신입사원과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하게 된다. 나 또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장애를 입고, 가진 꿈인 ‘동료 상담가’로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꿈은 모두 다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지치고, 힘들 때 가슴 속에서 혼자 꺼내어 보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의 보석상자 아닐까? 꿈을 꿀 수 있는 자체도 행복하지만, 미래에 추억이 큰 재산이기도 하다. 잊고 있었던 먼 이야기만 같던 나의 꿈을‘난장판’을 통해 펼쳐보니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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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국문학도를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한 아이. 하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아이. 안녕하세요^^ 김빛나입니다. 대학교에서 플루트를 전공했습니다. '독립연대'에서 '활동가'로 근무 중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심리상담가'가 되겠다는 스물다섯의 당찬 아이. 저는 꿈꾸는 아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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