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쿠버 공항 사진. ⓒ이상호

doctor kimble(도망자 - 이하 K)

영화 도망자 주인공 이름이고도 하다.

그는 1965년 생이다.

대전 외곽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렸다.

당시 대도시 소아마비 예방접종률이 50% 미만이었으니 사실 중소도시나 농어촌은 무방비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멀리 미국에서 배를 타고 반년이 지나서야 도착 했던 백신도 사실 백신이라 하기 어려웠다.

병원에는 하릴 없이 누운 채로 실려 오는 소아마비가 몰려들었다.

의사도 해열제 이외에는 딱히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K는 장애인이 되었다.

불과 백일에 일어난 일이니 그에게는 비장애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의 장애가 목발을 짚고 일어 설 수 있을 정도로 되었던 것은 온전히 어머님의 덕이었다.

좋다는 약이 있다면 한 겨울에도 온산을 뒤졌고 용한 의사가 있다면 전국 어디라도 길을 나섰다.

금침시술이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 당도한 곳은 어느 섬이었다.

당시 섬 지역에는 변변한 여인숙조차 없었으니 민가 한 귀퉁이를 얻어 아이가 침을 맞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섬 곳곳에서 날품을 팔아 생존을 연명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K를 업고 길을 나서 한의원을 들러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남의 집 개수대 근처를 서성거렸다.

K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에만 골몰했던 어머니는 몇 날을 굶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개수대에는 쉰밥이 씻겨 내려간 채 한 줌 정도가 남아 있었고 어머니는 길에 사람이 뜸 한 틈을 타 개수대에 흘린 쉰밥을 주워 먹고 계셨다.

당시 K는 누운 채 등을 돌릴 수도 없었으니 어머니를 길모퉁이 그늘에 누운 채 속절없이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K는 혹여 어머님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만 겨우 돌린 채 눈물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허기를 면하신 어머니는 다시 K를 업고 길을 나섰다.

헛간을 겨우 면한 잠자리로 돌아오는 길 !

K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무소리 없던 어머니도 K의 눈물로 젖은 등어리에 한기가 올 쯤 그녀 역시 눈물을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님의 날품을 대가로 밥을 먹은 K나 개수대의 쉰밥을 생존을 위해 챙겨먹은 어머니나 모진 운명을 저주할 만큼 힘든 하루하루는 꽤 긴 시간을 이어졌다.

쉰밥을 드셨던 어머니는 그날 !

저녁 배앓이를 이기지 못해 K가 잠들 무렵 다시 길로 나와 등이 꺼질 정도로 먹은 것을 토해냈다.

서러움과 눈물도 함께 말이다.

K 역시 잠든 척 했으나 이불호청을 밤새 적셔야 했다.

그날의 일은 각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결코 잊지 못할 일이었으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목발을 짚을 정도가 되니 학교를 다니게 됐다.

허나 등교하는 길은 K에게는 죽음의 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K가 중학교를 알아볼 쯤 이사를 제 때 하지 못했던 K의 집안사정으로 인해 꽤 먼 길을 다녀야 했다.

학교는 K 어머님의 가녀린 눈물과 읍소로 K를 받아줬으나 학교까지 당도하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버스는 K를 받아주지 않았다.

K 앞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애써 K를 외면했고 택시 역시 마수걸이(그날 처음 타는 손님)에 병신이 타려하니 재수 옴 붙었다며 K를 외면했다.

걸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놈의 인도 역시 턱이 문제였다.

몇 개의 턱을 오르내리던 K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차도로 길을 정했다. 운전사들의 모진 욕을 듣는 것쯤이야 감당해낼 수 있었지만 거대한 성벽처럼 K에게 모진 등을 드리운 육교가 문제였다.

닿을 수 없으니 차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조심한다 했으나 애초에 그리 될 일이 아니었다.

새벽밥을 해 먹고 비장애인학우들보다 먼저 길을 나섰다.

술에 취한 채 새벽길을 달리던 차량은 육교 밑 차도를 지나던 K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그의 허리를 찍었다.

K는 차에 치인 채로 죽음을 목도 했다.

K가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차에 치여 튕겨져 나간 곳이 마침 인도 쪽 이었기 때문이다.

뒤 따라오던 차량을 피할 수 있던 것이 그나마 행운이 됐다.

튕겨져 나간 곳이 길 한복판이었다면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퇴원 하던 날 !

K는 집에 가도 잠이 오지 않을꺼라는 핑계와 함께 친하게 지냈던 간호사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부탁했다.

K는 수면제를 먹은 채 다소 곳이 누워 보았다.

14살 소년은 삶보다 죽음이 더욱 편할 것이 라고 생각했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어는 책에서 읽어 냈던 아나키스트의 말이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삶의 그 어느 순간보다 편하리라 생각하며 누웠건만 죄인처럼 동동거리며 모진 삶을 살아냈던 어미의 눈물이 가슴에 맺혔다.

개수대의 쉰밥이 떠올랐다.

소금물을 바가지로 들이키고 삶을 택했다.

14살 비장애인 소년의 일상에서는 상상치 못할 K의 하루 이었다.

K를 업고 병원 응급실에 당도했던 어머니는 의사에게 호된 욕을 들어야 했다.

그런 약을 아이들 보는 곳에 놓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의사는 게거품을 물었다.

벽은 세상이 쳐 놨는데 죄는 어머님이 져야 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갈 길을 정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학교와 자는 곳이 같이 있는 복지시설이 있다는 소식에 K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런저런 학업을 그곳에서 마치고 유학길을 나서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는 날이 오는 날이 되고 말았다.

마침 누군가에게 호되게 맞고 있는 K, 또래아이를 보게 되었다.

다리를 때릴 수 없으니 아이는 손바닥을 맞고 있었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수십 대에 이르니 그날, 그 아이는 숟가락을 들 수 없을 듯 했다. 그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이해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 어차피 당분간 쉬어야 하니 다니던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이사는 힘들었다.

차도와 차가 없는 길이어야 했다.

되도록 가는 길은 밝아야 했다.

육교는 단 한곳도 없어야 했다.

다시는 아이에게 고통을 감내 케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가는 길이 자식을 죽음으로 내 모는 길이 돼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학은 대구로 길을 나섰다.

의사가 되리라 마음을 정했던 K의 꿈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국립대는 물론이고 종교사학에서 조차 K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K에게 하느님은 등을 온전히 돌린 채 자리해 계셨다.

장애를 듣지 않으셨고, 장애를 보지 않으셨다.

어찌 된 영문인지 K의 기도만 듣지 않으셨다.

어두운 골목에서 속절없이 울고 계신 하느님이었다.

K에게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으나 보지도 듣지도 대답도 없는 하느님이었다.

온전해야 할 하느님의 세상은 장애가 되어 있었다.

추천 하셨던 목사님조차 K를 봐라보지 못했다.

의사가 되리라던 꿈은 온전히 장애를 가진 후배들을 위한 것이었다.

개수대에 쉰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K의 선택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길이 틀어진 후 또 다른 길이 있었으나 그 길은 닿지 않는 길이었다.

사회복지학과 이었다.

어차피 졸업 해 봐야 장애를 받아 줄 곳은 없었다.

복지시설에서조차 장애인은 취업을 할 수 없는 것을 장애인선배들을 통해 익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술로 세월을 낚고 있었다.

K는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모르는 일이었다.

K가 술을 시작 했던 것은 그 때 쯤 이었다.

대구대 앞에 자리 해 있었던 대명시장은 비교적 싼 값에 취 할 수 있었다.

후문을 나와 몇 자욱만 걸으면 발길이 닿았던 짜장면집은 낮술거리였고 정문을 나와 도착했던 대명시장은 밤을 새워 달릴 수 있는 곳이었다.

여타 학교 보다 장애인동료가 많았던 학교 분위기 탓에 술에 취해 길을 걸어도 그리 낯설지 않게 보아 주었다.

80년 대 중반 ! 술은 부전공쯤으로 세상은 이해해 주었다.

장애가 있는 K가 유일하게 세상에 향해 울분을 토하고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술이었다.

의대를 접었던 K에게 어머니는 충분한 술값을 보내 주셨다.

낮과 밤을 도와 술에 취했던 K를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수면제의 기억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미는 술에 취해 세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 14살의 아픈 기억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민희를 만났다.

서양학과를 지망했던 민희는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고 2지망 이었던 특수교육과에 재수 없게(?) 합격을 했다.

시간이나 때우다가 재수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서양학과야 실기가 중요하니 술과 예술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 생각했던 민희는 K의 동선과 마주쳤다.

싼 값에 낮과 밤을 도와 술을 먹을 수 있는 곳에 일찌감치 K는 자리 잡고 있었다.

꼴에 특교과이니 가는 곳 마다 마주치는 K의 장애가 눈에 띈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장애 덕에 정문과 후문만을 서성거렸던 K는 민희의 길동무 덕에 계명대까지 닿게 됐다.

학교는 작았지만 참 예뻤다.

술에 취해 나서는 대명시장에서 계대까지의 길은 고즈넉했으니 몇 자리에 노래도 부르고 쉬어 가기도 했다.

계대에 도착하면 노천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뿌연 가로등에 서성이는 학교 이 곳 저 곳은 K를 위로 해 주었다.

누구도 보는 사람은 없으니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긴 시간을 맘 편히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분명 길을 나서려 했으나 세상은 K에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이리저리 채이고 밟혀도 끊임없이 길을 나서려 했으나 단 한 번도 세상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제 홀로 덩그러니 패배자인 모습 그대로 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관계도 사치였고 그것을 받아 줄 만큼 시간도 없었다.

항상 다른 이보다 먼저 시작했음에도 그 결과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끝자리만 남아 있었다.

민희와 나누었던 연정의 시작은 당연히 술자리가 되었다.

민희는 별것도 아닌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영민했으니 K의 간을 본 것 같다.

아버지의 폭력이 내내 감싸 돌았던 집안 풍경이 싫어 일찌감치 집을 나왔던 민희는 자취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정을 느끼고 살지 못했으니 아버지는 미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그리운 것이기도 했다.

폭력에 굴종했던 어머니가 밉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민희에게 가족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집을 나와 일정의 시간이 지나 안정을 되찾은 민희는 연예를 시작했다.

아니 연예가 아니라 부정(父精 - 아비의 정)을 그리워하거나 부정을 외면하는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와 같은 밤을 보냈다.

부정(父精 - 아비의 정)을 그리워하는 것이었으나 결말은 연정이 되고 말았다. 민희에게 연정의 끝은 혼란스러웠다.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이 죄가 되던 시대였다.

부정(父精 - 아비의 정)을 그리워했던 것이 부정(否定 -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이 됐다.

그 혼란스러움과 K의 상처는 적절히 술잔과 마주 닿아 서로를 위안했다.

같은 학번이었으나 다른 나이였음에도 민희는 K에게 꼭 반말을 했다.

너 정도의 인생풍파는 나도 겪었다면 개기려 했으나 K의 속내를 알면 알수록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민희의 혼란스러움을 K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것이 뭐가 문제냐며 희미하게 웃음을 보냈다.

대명시장에서 계대 교정까지 이어졌던 그 해 겨울은 그런 대로 아름다웠다.

아주 잠시 말이다.

어느 날인가 눈이 몹시 내렸다.

분지 형태인 대구의 겨울은 길 위의 눈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곧 길은 빙판이 되고 K의 불편한 걸음은 술에 취한채로 몇 번인가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어차피 세상은 K에게 끊임없이 넘어지고 쓰러지게 만들었다.

술 취한 정신이었으니 빙판길은 K에게 설움까지 복 받치게 했다.

K가 잘못 한 것은 없다.

원하지 않았으나 장애인이 되었고 원하는 것은 장애를 이유로 모두 거부되었다.

몇 번인가를 넘어지다 결국 짝지(목발)가 부러 졌다.

속절없이 한 대 잠을 자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민희는 여관으로 가자했다.

짝지가 부러 졌으니 민희의 등을 빌려야 했다.

취기가 오른 K는 업혀 가는 길이 예전에 개수대에서 쉰밥을 드시던 어머님과 같은 길이라 착각했다.

어머님에게 업혀 가는 길은 서러웠으나 그날 민희의 등은 왠지 따스했다.

부정(婦精 - 아내의 정)인지 모성애인지 그날 밤의 민희가 K를 대했던 속내는 알 길이 없다.

먼 길을 K를 업고 왔으니 민희는 곧 잠이 들었다.

자는 민희를 바라보았다.

어머님의 얼굴과 민희의 얼굴이 교차했다.

새벽녘에 목이 탔던 K는 물을 찾았다.

민희의 곤한 잠을 깨지 않으려 주전자를 찾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잠이 오지 않아 TV를 틀었다.

이 무슨 일인가?

TV에서는 젊은 남녀가 벌거벗은 채 뒹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K는 급히 TV를 끄고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들끓는 속을 달래려 해장국집을 찾아 국물을 들이키던 와중에 민희는 의미심장(?)하게 K에게 한마디 했다.

어제 TV 소리와 밤새 끙끙 대던 니 소리 다 들었다고 .......

고맙다 했다.

아 C-8!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밤새 그 소리를 다 들었을 민희를 생각하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민희는 K를 통해 폭력에서 벗어난 따뜻한 부정을 만났고 K는 민희를 통해 서럽지 않은 모정을 만났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될 것이라 했다.

단 몇 달간의 연정은 학내에 소문이 퍼져 민희의 부모에게 까지 전해졌다.

민희의 부모는 K를 찾아 왔다.

대판 울어대던 민희의 부모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헤어지지 않으면 마시고야 말 겠다는 그것은 극약이었다.

반대는 예상했으나 죽음을 나눌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나누고자 했던 부정과 모정은 부정(否定 -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이 되었다.

민희와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는 말했다.

잊지 않고 있으면 꼭 만날 것이라 했다.

언제고 꼭 만날 테니 기다려 달라 했다.

K의 어머니는 민희의 부모에게 몇 차례 따귀를 맞았다.

K는 죄인처럼 주변을 서성거릴 뿐 이었다.

돌아오는 길 !

어머니의 좁은 어깨와 나지막한 등어리는 이미 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예정해 놓은 듯 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K는 14살에 시도했던 자살의 편안함을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모정을 팔아 세상을 살아내야 했던 장애는 그 자체가 저주였다.

K도 어머니도 잘 못한 것은 없다.

허나 고스란히 그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이유는 명료했다.

장애!

그것은 어머니에게도 K에게도 끊이지 않는 모멸과 저주를 감내 케 했다.

몇 년이 지나 민희의 결혼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분노와 억울함을 토해낼 길이 없었던 K는 학생회를 드나들었다.

K에게 운동과 조직의 목표가 민족이든 계급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분노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K는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걸었다.

빵에 갔다.

짝지를 빼앗긴 체 취조실 의자에 K는 몇 날을 묶여 있었다.

눈을 가리고 맞았던 매는 K에게 시간까지 빼앗았다.

몇 날을 맞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화장실에 갈 수 없었던 K는 의자에 묶인 체 오줌을 누었다.

형사는 그 모양새를 즐기는 듯 했다.

취조실에서 더 이상 털어낼 것이 없었던 K는 곧 구치소로 향했다.

그 곳은 오히려 K에게 편한 곳이었다.

수형자들은 오히려 K의 장애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그들은 아무리 죄를 지었지만 짝지를 빼앗는 일이 어디 있냐며 K의 수발을 감당했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빼앗긴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책으로 소일을 하면 될 일이었다.

정신은 깨어있으나 조국은 끊임없이 그를 난도질했다.

조국은 마취 없이 K의 생살을 도려내고 있었다.

어느 날 ! 민희에게 전화가 왔다.

울산이니 오라했다.

말없이 전화를 끊었던 K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이혼을 했다.

아이와 함께 미술학원을 열고 있었다.

아이는 볼 수 없었다.

그날 민희와 K가 나누었던 밤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사랑, 죄책감이 혼란스럽게 뒤 섞였다.

비춰지지 않는 그동안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각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

말없이 비워내던 술잔의 끝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민희는 K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둘 사이에 먼 다리를 놓아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 말하고 싶었다.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과 서러움 중에 항상 같이 있었다 말하고 싶었다.

민희가 보기에 K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따뜻이 자신을 안았던 부정은 찾아 볼 길이 없었다.

무슨 연유인지 K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만을 하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민희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민희는 K와 헤어진 날부터 지금까지 손톱은 온통 까만색이었다.

계명대에서 나누었던 밤의 색깔이라 했다.

다음 날 ! K는 걸어왔던 자리에 아무 일 없는 듯 자리했고 속내를 말하지 못했던 민희는 K의 분노만을 기억했다.

서로에 대한 죄는 없으나 각자의 죄책감만 덩그러니 남긴 체 말이다.

K는 활동을 정리했다.

장애를 다루는 운동은 없었다. 있다 해도 주력의 주변부였을 뿐이다.

함께 가는 길에 장애형제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탕발림이 전부였다.

세상을 나누고 세계를 분석하는 모든 담론에 장애는 없었다.

주력운동에 복무하는 부문계열운동의 지위라 했다.

번드르르 한 현학이었으나 장애는 그들의 담론에서 따까리나 상징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진보조차 무지의 길목에서 장애를 자선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들의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장애는 해결되지 않는다.

밴쿠버 호텔

종교사학에 추천했던 목사님의 조력으로 K는 유학길에 올랐다.

아니 도망자가 되었다.

그 후 K는 조국에서 자신을 지칭했던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그리고 또한 ...........

조국에서 이루지 못한 의사의 꿈을 이루려 했다.

저주 같은 강박수준의 자기암시를 위해 K는 자신을 doctor kimble이라 했다.

조국에서 버림받은 도망자라 했다.

사실 의사의 꿈 때문에 유학길에 오른 것이 아니라 14살의 꿈을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벤쿠버 공항은 서러웠다.

종일 아니 몇 달을 비만 내렸다.

수만의 원주민을 학살했던 역사를 감춘 체 그 곳은 백인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인권과 복지의 국가로 덧칠이 되어 있었다.

학살과 저주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밴쿠버는 몇 달간을 비와 함께 울고 있었다.

그곳 겨울비는 suicide rain(자살을 부르는 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고, 그때 자살률이 극히 높아진다고 했다.

14살의 꿈을 이루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학살당한 원주민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은 맞닿아 있다고 K는 생각했다.

만인의 지지보다 한사람의 저주가 더 무서운 법임을 조국은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SUICIDE RAIN(자살을 부르는 비)

가난한 아이들에게 꽁짜로 미술학원의 문을 활짝 열었던 민희의 선행이 어

설픈 모양새로 귀감이 됐다.

아니 민희는 그 곳에서 헌신을 나누었다.

졸업하지 못했던 특교과가 내내 마음의 짐이었던 민희는 장애 아이들에게 미술이라는 품을 나누었다.

다만 유행어처럼 번졌던 미술치료라는 용어는 한사코 거부했다. 치료가 아니라 치유를 돕는 것이라 했다.

그들의 가족사는 장애가 있으니 가난이 점철되었다.

장애를 비장애로 되돌리려 했던 헛된 꿈의 대가는 민희가 보기에도 혹독한 것이었다.

아비는 술로 어미는 생존을 이어갔던 집안 풍경은 항구도시의 장애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대도시에서 가난으로 밀려나와 생존을 이어가는 장애가정이 많았다.

장애는 개인인데 장애는 가정까지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희가 보기에 그들의 존재는 낙인과 형벌 ! 그 자체 였다.

아비가 없었던 민희의 아이에게도 그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닿지 않는 부정의 꿈을 아이에게도 나눈 것 같아 민희는 내내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비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술은 장애아를 둔 어미의 몫이기도 했으니 그녀들은 민희의 학원과 집안을 자기 집처럼 오고 갔다.

민희의 아이가 장애 스럽고 그녀의 아이들이 오히려 비장애 스러웠다.

사실 아이들에 세계에서 그것은 애초에 나누어 질 것이 아니었다.

속절없는 주류사회의 욕망이 장애와 비 장애를 나눈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만 바뀌면 간단한 일이라 생각했다.

장애인부모회의 일은 그녀의 삶처럼 다가 왔다.

몇 년간의 활동의 대가는 당연히 장애아 부모님들의 몫이라 했으나 부모님들은 온전히 그것을 민희에게 양보했다.

장애와는 상관없는 민희와 그녀의 아이는 비장애였으나 장애는 그녀의 헌신의 몫을 비워두고 나누어 주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주류사회의 DNA에서는 이해되지 못 할 일이다.

시민사회 활동가 재충전 해외연수에 민희가 당첨됐다.

가고 싶은 곳에서 1년간의 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민희는 짐 보따리를 싸들고 아들과 함께 밴쿠버의 길을 올랐다.

혹 연정이 틀어지면 그쯤에서 삶을 정리해보는 것도 괜 찬다 하며, K 와 농을 건네던 곳이었다.

밴쿠버 공항은 을씨년스러웠다.

공항 안에 호텔이 자리해있었고 아이와의 호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삶이었으니 하루 쯤 무리를 하자 생각했다.

밴쿠버 호텔 방안 전면은 온전히 유리로 장식 되어 있었다.

커다란 공룡이 몸을 누인 체 비를 피하는 모양새로 공항은 땅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손톱처럼 공룡은 온통 검은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다른 빛깔은 섞일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심장과 같은 빛깔이었다.

K와 그녀의 예상은 맞아 들었다.

삶을 정리하기에는 맞춤이었다.

허나 그녀에게 아이가 있었다.

마음을 돌이키고 아이와 욕실 가득 물을 받아 장난을 나누었다.

아이는 참으로 즐거워했다.

아이에게 온전히 자신만의 어미는 없었다.

빈자리를 메워 줄 아비는 더더욱 없었다.

이제 일 년 동안 어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아이는 말했다.

민희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리 정리되지 않을 생이었는데 일이 틀어졌다 생각했다.

아이가 잠이 들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민희는 호텔방을 뒤져 술을 찾았다.

미니어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각종 술들이 방안 곳곳에 자리를 틀고 있다.

방안 전면을 둘러싼 창 밖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가 내린다.

모자란 술을 사려 방을 나섰다.

술을 사러간 슈퍼에서 K를 만났다.

그리 놀라지 않았다.

많이도 취한 K를 업고와 침대에 뉘였다.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놀라 잠에 깬 아이는 누구냐 물었다.

아버지라 했다.

다음날 아침 K의 눈가에는 ................

에필로그 [epilogue 혹은 뒷 담화문]

doctor kimble은 실존 인물입니다. 그는 조국에서 못 이룬 의사의 꿈을 향해 조국을 버리고 타향을 택했습니다.

조국을 저주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아니 조국을 사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비어 여유가 있을 쯤 이면 그는 양주 한 병을 들고 바다가로 향한다! 들었습니다.

먼발치에 비켜 서있는 조국을 봐라보며 꺼이꺼이 우시기도 한다! 들었습니다.

조국은 이제 장애인복지 관련해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없는 정책이 없으며, 걸러내지 못 할 장치가 없게 되었습니다.

종류만 널어 논다면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장애인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달성할 과제가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차별 금지, 연금, 주거, 활동보조인, 탈 시설…….

이념적 선진 성까지 포괄하는 제도와 정책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외국의 장애인운동 지도그룹까지 이러한 성과에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내공이 계신 분의 찬사의 미소에서는 냉소 역시 존재합니다.

간판만 걸어놨지 정책의 정반합과 현실, 지속성을 의심케 하는 예산, 장애인당사자에 의한 정책 주도권은 갸륵한 선전문구의 뒤안길에서 갈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과연 세계적인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조국의 장애인복지보다 천박한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 답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장차법이 있는가? 없는가에 단순비교에서는 조국은 게거품을 물 정도로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허나 일본은 마땅한 법적 장치 없이도 24시간 활동보조인이 이루어지고 구지 탈 시설정책이라 거창한 이름을 가져 오지 않아도 주택은 지원되고 있습니다.

실질소득에 준하는 연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조국의 전문가들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던 자민당의 장애인자립지원법에 대한 반성을 한다고 일본 민주당은 공언하고 있습니다.

자부담의 확대와 활동보조서비스를 가사, 간병으로 국한시키고 수용시설까지를 포괄하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는 장애인장기요양제의 반성 말입니다.

백번을 양보해도 장애인은 환자가 아니니 요양은 필요 없습니다.

설사 요양이 필요하다 한들 그것은 비장애인과 동일한 설계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쓸데없는 자격증과 전문성만 포장되어 그나마 제한적인 활동보조서비스 이용시간이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할 까 두렵습니다.

조국의 전문가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일본의 장애인자립지원법을 왜 일본 민주당은 반성한다 하는지에 대한 연유를 전문가들이 스스로 밝혀낼지는 의문입니다.

Regulation Compliance(규칙 준수)

아무리 정책을 잘 만들어도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구성원이 잘 따르지 않고 예외가 많아지면 정책은 설 땅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Compliance는 구성원의 준수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정권만 들어서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애인주차장 단속입니다.

법은 있으나 지켜지지 않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권과 상관없이 역대총리들은 이 문제에 있어 모멸감을 당할 정도로 깨져 왔습니다.

허나 아직도 조국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못 내고 있습니다.

正 治(바를 정, 다스릴 치)

말 그대로 바르게 다스리는 일이고 다스림에 있어 게기는 놈들에게는 매를 들어야 하는데 역대정권은 진보와 보수와 상관없이 이 문제에 대해 매를 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에 그치지 않았음은 이 땅에 수많은 doctor kimble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애는 법과 제도와 상관없다는 것과 다름 아니며, 적당한 시기에 적당하게 온정과 불쌍함을 포장하여 연민으로 다뤄주면 되는 일입니다.

장애인주차장에 비장애인이 차를 대는 것을 보며 한 따까리 하는 일은 장애인당사자만의 몫이 돼 버렸습니다.

이 쯤 되면 조국의 장애인당사자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 이 C- 8! 차라리 법이 없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과 애초에 조국의 구성원이 아니었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조국은 없습니다.

큰 별이 지다 !

노 무현 대통령 !

김 대중 대통령 !

돌아가셨습니다.

그 길에 앞서 김 수환추기경님께서 똑 같은 길을 가셨습니다.

이후 조국은 보수의 길을 상당기간 갈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 찬반을 떠나 조국의 보수는 앞으로 많은 답을 내야 합니다.

조국의 보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민족이 없는 듯 합니다.

친일에 대해 명쾌한 답을 못 내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애국(?)이든 적어도 조국의 애국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따뜻한 아랫목은 그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얼음장 같은 윗목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무엇입니까?

흑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교육의 중요성을 애기했습니다. 들여다보면 결국 흑인당사자의 역량강화를 애기하는 것입니다.

인종 문제를 해결할 제도와 정책이 설계되고 흑인 당사자의 역량강화라는 전략적인 집단의 형성이라는 two Track이 필요합니다.

오바마가 대학 장학금을 증액하고, 미국인 모두에게 평생학습 계좌를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정책을 펴는 것도, 또한 하토야마 총리가 직업훈련기간 중 최대 월 10만엔 지원금을 지급하려는 것도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가 21세기 경쟁력의 기반이기 때문이라는 판단입니다.

조국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있으나 그들의 역량을 강화 할 길이 없다면 제도와 정책의 존속성은 끊임없이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조국을 등지고자 하는 수 많은 doctor kimble앞에 조국은 서 있습니다.

조국의 수많은 doctor kimble의 삶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능력이 최대화 될 리 없습니다.

만인의 지지가 아닌 만인의 저주가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조국은 그 수많은 장애인복지의 양은 질을 담보하기 위해 정반합을 찾기 위한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됐습니다.

1987년 박 종철 열사 추모 미사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은 조국에게 물었습니다.

탁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국민의 한 사람인 박 종철은 어디 있느냐?

조국은 모른다! 답했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님은 그것은 바로 카인의 대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카인의 대답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얼음장 같은 윗목 어딘가에 누워 있을 조국의 장애인당사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카인 ; 인류 최초의 살인자 !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맏아들.

자기의 제물이 하나님 야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우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자, 이를 시기하여 동생을 돌로 쳐서 죽였다.

추서 ; 이제 저는 에이블을 떠납니다.

분신 같았던 수많은 K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고 고마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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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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