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순해보이거나 만만해보이는 사람이 화가나면 더 무서운 것처럼 요 며칠 따뜻해진 날씨에 겨울을 우습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화가 났는지 한 번 화가 난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쌓였던게 많았는지 날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안 그래도 일어나기 힘든 아침은 추워진 날씨 덕에 더욱 고되게 되었다. 추운 날씨를 탓할 수는 있지만 그 핑계로 일과까지 접을 수는 없기에 온갖 칼 바람을 견디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씻고 휴식을 즐겼다. 외출 후 집에서의 이런 휴식은 꿀보다도 달고 꽃보다도 향기롭다. 이런 행복감에 도취되고 있을 즈음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네, 무슨 일이시죠?"

"택배가 와 있습니다. 찾아가시라고요."

아차! 택배. 오후에 부재중인 관계로 경비실에 두고 간다는 연락이 왔었음을 깜빡 잊고 귀가 길에 경비실에 들르지 않았다. 이런 건망증으로 인해 내 달콤한 휴식은 여기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일과 시간 내내 마주했던 칼바람을 또 맞아야 했다. 아파트 현관을 나가서 경비실까지의 거리는 약 15미터. 왕복으로 약 30미터인 짧은 거리이지만 이제 막 녹인 몸을 다시 냉동창고로 밀어 넣을 생각을 하니 왠지 억울한 기분이다. 하지만 택배가 무슨 물건인지 알기에 그래서 꼭 가져와야 하기에 꾸역꾸역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 현관문에 도착해 마치 육상 경기에 나선 선수처럼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단히 조인 후 눈에 힘을 팍 준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사인 볼트’보다 더 재빠르게 내달렸다. 슬리퍼가 닳도록 잽싸게 내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는데 날 단박에 멈춰 세운 목소리가 있다.

"잠시만요."

목소리가 날 세웠다기 보단 그 분의 머뭇거림이 날 세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는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와 계셨다.

"네?"

"정말 미안한데요. 저, 이 휠체어 좀 들어서 올려주세요. 이 턱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네요. 지나가는 사람이 청년뿐이라…."

할아버지는 아파트 상가로 이어지는 입구의 한 계단 높은 턱 앞에서 우물쭈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난 흔쾌히 대답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 턱이 없는 병원 안에서의 경험인지라 턱을 넘게 하는 방법을 몰랐다. 휠체어를 밀어봤음에도 그걸 모른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에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저…, 할아버지! 이걸 어떻게 들어야하죠? 앞에서 들어 올리면 되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뒤에서 손잡이를 잡고 밑으로 확 누른 후 앞으로 밀어보세요."

장애인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장애인 친구들이 있고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처럼 부끄러웠을 때가 없다. 덕분에 볼이 화끈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라 칼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할아버지 뒤로 돌아가 설명해 주신대로 손잡이를 잡고 꾹 눌러 턱을 넘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죠?"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말씀하셨고 고맙다며 내게 눈인사도 하셨다. 난 할아버지께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인 '생각보다 참 쉽죠?'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날은 택배보다 더 귀한 물건을 선물 받은 날이었다.

장애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생각보다 쉽다. 힘들고 어려울 것만 같았던 휠체어 올리기는 정말 쉬웠고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를 만드는 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건물을 설계할 때 장애인 출입을 위한 설계는 필수이다. 상가로 통하는 그 길목에도 작은 경사로만 하나 있었어도 할아버지께서 그 칼바람을 오랫동안 맞으며 누군가가 지나가기 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언젠가 모든 장애인들이 외출하기 참 쉽고 이동하기 참 쉽고 행복하기 참 쉬운 세상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을 보내온 장기웅님은 2009년 제21회 계간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에 당선된 수필작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기고회원으로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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