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K씨. 메일 잘 받아보았습니다. 장애문제와 장애인의 삶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는 비장애인으로서, 동시에 재활학을 공부하는 전문가로서 정체성의 고민을 말씀하셨지요?

솔직히 저는 이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저만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정체성의 고민이 있지만,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과 연대하고자 하면서도 자신이 정작 장애인일 수는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지요. 저는 오히려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하고자 노력했으면서도, 결국 제 자신이 장애인이며 장애인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사이에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제가 우리 모두가 결국 풀어야할 중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운동이든, 사회일반의 모든 삶에 대해서든, 우리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클라이언트와 전문가라며 분리되었던 ‘두 가지 세계’를 가로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을 감히 공적인 공간에 풀어봅니다.

당사자란 무엇인가

사실 저는 ‘장애인당사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는 비장애인 전문가집단에 의해 삶의 결정권을 빼앗겨 왔던 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고,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단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파트너가 되고, 이를 통해 지원금을 선점하며, ‘장애인당사자’로 구성된 용역깡패집단이 장애인운동진영에 찾아와 폭력을 휘두른 사례들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당사자’라는 말이 때로는 위협적으로 들릴 때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사회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살아야할 삶은 정형화되어있습니다. 교육, 노동, 사랑, 결혼, 양육. 그 모든 것들에서 철저히 배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바로 ‘장애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사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통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때로 현실을 무시한 태도입니다. 아무리 K씨가 노력하려 해도,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삶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K씨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삶의 조건들을 부여받고 살아가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장애인의 삶에 얼마나 공감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장애인의 삶을 객관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손을 붙잡고 “나도 당신도 모두 똑같이 나약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이니, 서로를 위로해줍시다”라는 말을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태도는 아름답고 서로에게 힘을 주지만, 저는 아름다운 공감보다 당장 어딘가에서 갇혀 있는 한 사람의 장애인을 다양한 경험이 넘쳐나는 이 세계의 한복판으로 끌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내는 일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하찮은 존재라며 사회의 구석으로 던져진 모든 존재들을 세상으로 끌어내는 핵심적인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아마 그러한 일을 하는 데는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 단지 ‘정체성’만 장애인인 저보다도, 세계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가진 K씨와 같은 비장애인들이 훨씬 더 적합한 역할을 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애인운동을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삶의 질을 높이고 복지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제한하지 않고,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세계등장’을 돕는 대표적이고 전위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장애/비장애의 정체성으로 실천의 주체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전문가주의’를 넘어서

그렇다면 사회의 구석 어딘가에서, 단 한번 주어진 인생에서 아무런 열정도, 사랑도 경험하지 못하고 20대를 보내고 있는 장애인을 세계의 한복판으로 끌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K씨와 같은 분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은, 그것이 ‘전문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문가주의가 가져야할 태도는, 바로 장애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오만을 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났든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었든, 그에게, 아니 저의 삶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복지와 재활의 학문들은 바로 그러한 생의 투쟁들을 돕는 도구로서만 유의미할 뿐입니다. 누구도 하나의 존재를 ‘재활’시킬 수 없습니다. 재활되어야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K씨가 아무리 커다란 헌신과 책임의식을 갖는다하더라도, 결국 장애와 생의 끄트머리에서 대면하는 것은 저 자신이 아닙니까?

비장애인과 장애인, 전문가와 클라이언트로 구분되는 우리들은, 사실 각자의 무거운 삶의 무게들을 종국적으로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 누군가에게 함께 각자에게 주어진 무게를 나누자고 말하는 것은 의미 있고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상대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쉬이 말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어떤 부자유속으로 몰아넣었는지, 그리고 그 상대를 얼마나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어왔는지 저는 비록 젊은 나이지만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K씨처럼 자기 정체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성찰하는 ‘전문가’들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다만, 그저 제가 스스로를 돕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돕겠다는 선량한 의도와 전공 학문의 특정한 패러다임이 때때로 새로운 억압을 만들어내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고민과 성찰을 하는데 전혀 부족한 자격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하시구요.

p.s 이전 칼럼이었던 오바마의 정체성에 관한 글을 읽고, 미국에서 재활학을 공부하고 계신 분에게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칼럼은 그 분에 대한 답변이자, 그분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모두에 대한 저의 설익은 생각입니다.

20대 후반의 지체장애인. 태어나서부터 10여 년간 병원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특수학교 중학부, 일반고교를 거쳐 2003년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했고, 2009년부터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우주와 관련한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생물학 서적,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을 좋아한다. 스스로 섹시한 장애인이라고 공언하고 다니지만 가난하고 까칠한 성격에 별 볼일 없는 외모로 연애시장에서 잘 안 팔린다. 신이나 사람, 어떤 신념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자 노력중이다. 직설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화법을 종종 구사해 주변에서 원성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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