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은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 성공 스토리의 인도 버전쯤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시청각의 중복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미셸 맥날리는 8살이 될 때까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허리에 달린 방울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동물처럼 자란다.

8살이 되던 해에, 미셸의 아버지는 그녀를 지적장애아 보호소에 보내려고 하고 이를 원하지 않는 그녀의 어머니는 데브라이 사하이라는 교사를 통해 그녀를 교육하고자 한다.

사하이는 미셸에게 단어와 그 의미를 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어른이 된 미셸은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사하이 선생님은 미셸의 눈과 귀가 되어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다.

영화 <블랙>의 한 장면. "제겐 모든 게 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검은색의 새로운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검은색은 어둠과 갑갑함 뿐이 아닙니다. 그건 성취의 색입니다. 지식의 색입니다. 졸업 가운의 색입니다."ⓒ문영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낙제의 고배를 거듭 마시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졸업을 하게 된 미셸이 졸업 가운을 입고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하이 선생님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왜 그녀는 남들의 두 배 이상이 되는 시간이 걸려서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대학생이 된 그녀가 수업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하이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사하이는 미셸의 수업을 ‘통역’하고, 교재를 수화로 옮겨서 그녀에게 전하고, 그녀의 이동을 돕는다.

미셸이 세 번의 낙제를 하고 나서야, 대학교의 학장이 1학년 교재의 점역본을 만들었다며 ‘감동스럽게’ 사하이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점역본을 받은 후에도 점자 타이핑을 통해서만 시험지를 제출할 수 있는 그녀는 충분히 긴 시험시간을 받지 못했고, 아는 내용조차 시험지에 옮기지 못해 번번히 낙제한다.

병에 걸린 사하이가 그녀를 떠나고 나서,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공부를 계속했는지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미셸의 독백에 의하면 12년 후에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다양한 교훈을 얻을 것이다. 배움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하고 결국에 어렵게 졸업을 해낸 미셸의 향학열, 장애를 감싸 안는 교육적 마인드를 가진 사하이의 의지, 이를 묵묵히 지켜보며 포기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가족들.

우리는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미셸과 사하이의 만남이 우연한, 그리고 다행스러운 인연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회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장애를 극복하고 또 다른 미셸 맥날리가 되라고, 헬렌 켈러가 되라고 강요한다.

청각장애학생에게 대필 도우미 제도가 존재하고, 시각장애학생에게 점역본 등이 제공되는 나의 학교의 경우에도, 현행 서비스로는 수업을 완벽하게 따라가기 힘들며, 장애학생들은 끊임없이 인내력과 의지력을 시험 당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12년 동안 졸업장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삶과 투쟁한 미셸과 우리의 교육현실은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헬렌, 설리번에게 'No'라고 말하다." 2005년, 서울대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이 전문 속기사제도 도입을 요구하며 내걸었던 모토. (출처 : 서울대 장애인권연대사업팀)

만약 미셸이 사하이 선생님의 개인적인 헌신에 의존하는 대신 학교를 상대로 교육 제도의 변화를 요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문 통역사를 통해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수업을 보고 들을 수 있고, 점자를 1분에 채 30타도 작성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시험 시간이 연장되어 아는 것을 충분히 시험지에 옮길 수 있었다면? 교재는 필요할 때마다 점역본으로 받아 읽을 수 있고, 그녀의 생활과 이동을 돕는 도우미가 존재했다면? 그녀의 삶은 영화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전하지는 못했겠지만, 우리는 교육 주체로 당당하게 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발휘해내는 또 다른 모습의 미셸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분 좋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미셸이나 헬렌 켈러의 인내와 의지가 아니라 모두의 행동과 실천이다.

장애학생이 장애에 대한 마인드를 갖춘 사하이나 설리번이라는 교사 개인이 아니라 장애학생의 권리가 보장된 교육 시스템 하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비장애중심의 교육 제도에 반기를 들고 단호히 이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에게 바라는 바이다.

* 제목인 “헬렌, 설리번에게 ‘No’라고 말하다”는 2005년 서울대학교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이 전문속기사제도 도입을 요구하며 진행한 ‘청각장애학생 교육권보장을 위한 집중 행동주간’의 모토였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 모토가 현실로 옮겨지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모토를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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