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사육과 도축, 동물실험의 처참한 현실을 고발한 마크롤렌즈의 <동물의 역습>, 2004. ⓒ달팽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광우병이 이슈가 되었을 때 소를 도축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지게차 같은 중장비가 소들을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그러다 쓰러지는 소는 짐짝처럼 강제로 퍼 올린다. 양계장의 풍경은 어떤가? 가로세로 30센티도 안 될 만한 공간에 닭들이 들어앉아 밤에도 잘 수 없도록 조명을 밝혀 밤낮으로 알을 낳도록 강제 당한다. 돼지는 살을 찌우기 위해 최대한 운동량을 줄여야하고, 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움직일 수 없게 갇혀 지내며 사료만 먹는다. 그 사료는 때로 같은 종들의 뼈로 만들어진다. 그러다 생후 1년도 채 되기 전에 도축장으로 끌려가고, 몇몇 축산업자들은 도축직전 호수를 돼지의 입에 꽂고 강제로 물을 먹여 몸통을 불린 후 죽인다. 그렇게 우리의 밥상에 고기가 오른다.

이렇게 죽는 동물들의 숫자는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연간 200억 마리, 한국에서도 1억 마리가 넘는다. 채식주의자도 아닌 내가 이런 것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낳는지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 유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우리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태어나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아들은 작은 방 안에서 수십 년을 밥만 받아먹으며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살다가 외롭게 늙어 죽는다. 하지만 안타까워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일반인과 똑같은 삶을 살 기회를 주려면 너무 많은 비용과 사회적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말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사회에서도 통용되던 상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말로 윤리적 책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에 대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때로 동물들의 처참한 상황에 안타까워하지만, 국가경제를 위해 축산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며, 인간이 고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양계장의 닭들은 잠도 자지 못하고 알만 낳다 수개월만에 도축당한다. ⓒ노컷뉴스

동물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인가?

물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동물과 사람을 어떻게 같은 존재로 취급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런 반론에 대해 세계적인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 Singer)는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그럼 도대체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면 이성이 없다고 보이는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심각한 뇌질환을 갖고 있는 이들의 생명을 우리가 고귀하다고 여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좋다 그럼,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갖고 태어나, 만물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인(특히 기독교)들의 믿음체계에서나 가능한 논증이다.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근거를 들어야 한다. 그럼 좋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자의식이 있으니까? 마찬가지이다. 최근의 동물학 연구들을 보면 동물들도 충분히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다 자란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들의 자의식은 우리 인간의 어린아이보다 높다.

언뜻 보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 존귀하다”라고 생각되지만, 인간이 동물보다 특별히 더 존중을 받을 이유가 있는가 막상 따져보면 필연적인 근거를 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만약 우리가 인간을 지적능력이나 자의식 때문에 고귀한 존재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아무와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고아의 지적장애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소를 도축하듯이 죽여도 되는가? 당연히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입장을 주장하려면, 필연적으로 동물의 권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동물이나 인간(사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다)이 똑같이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인간의 권리, 특히 장애인의 권리까지도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왜 그 자체로 고귀한가. 그것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자체가 우주의 여러 분자들이 놀랍게 결합된 경이로운 생명활동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우주의 경이로운 신비 그 자체이고, 자신이 파괴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특별한 특성 때문에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짐메이슨과 피터싱어의 저작 <죽음의 밥상>, 2008, 저자들은 동물의 사육과정과 도살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들이 어떻게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산책자

따라서 장애인의 인권을 말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생태주의자여야 하고, 환경주의자여야 하고, 동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 않게 수백 억 마리의 동물을 잔인한 방식으로 사육해 도살시키는 현재의 시스템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그보다 다양한 신체적 조건과 지적능력을 가진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무조건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장애인도 인간이다”라는 표어는 충분치 않다. 장애인이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도 고통과 괴로움을 회피하며 생을 지속하고자 욕구하는 ‘동물’ 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덧 1) 물론, 그렇다면 우리는 식물을 포함한 아무런 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되는가, 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법칙 자체를 윤리적 이유로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그저 우리들이 생명자체를 귀중하게 여기고, 좀 더 윤리적인 방식으로 동물들을 기르며, 지금처럼 연간 수백억 마리씩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도축구조를 유지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준만으로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세계가 될 것이다. 사자도 사슴을 잡아먹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슴에게 풀을 뜯어먹고 새끼를 낳아 키울 생활터전과 시간은 남겨준다.

덧2) 동물들을 좀 더 윤리적인 방식으로 길러야 한다는 것은 단지 '윤리적' 문제만은 아니다. 실제 광우병과 같은 질병역시 동물들의 사육방식에서 비롯된다. 또한 우리가 동물을 기르는데 들어가는 곡물들을 인간의 식량으로 돌린다면, 전세계에서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어가는 연간 4억명의 사람들를 먹여살릴 수 있다(시사인.08.5.7 기사 참조) 이처럼 동물해방 담론은 윤리적 이유를 넘어,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아, 그나저나 필자 역시 육식을 줄이기란 너무나 힘든 고통임을 매일같이 느끼고 있다.

20대 후반의 지체장애인. 태어나서부터 10여 년간 병원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특수학교 중학부, 일반고교를 거쳐 2003년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했고, 2009년부터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우주와 관련한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생물학 서적,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을 좋아한다. 스스로 섹시한 장애인이라고 공언하고 다니지만 가난하고 까칠한 성격에 별 볼일 없는 외모로 연애시장에서 잘 안 팔린다. 신이나 사람, 어떤 신념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자 노력중이다. 직설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화법을 종종 구사해 주변에서 원성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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