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석을 담은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세상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장애를 고치는 알약을 거부하다

“난 지금 당장 장애를 고치는 알약이 개발된다고 해도 먹지 않겠다”

일본의 한 자립생활운동가의 말이라고 한다. 장애를 ‘고쳐야할’ 비정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당당하게 새기는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장애 자체가 하나의 ‘특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기반이 조성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장애’는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과 같은 말은 아니다. 우리의 생물학적 변이나 특성이 적응할 수 없는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장애’가 된다. 그러니 결국 ‘장애’란 일단 부정적인 것이기는 하다. 다만 그것의 원인이 나의 생물학적 특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적응하기 힘들도록 구성된 ‘외부’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장애’ 자체는 고쳐져야 할 것이 맞다. 다만 어디를 고쳐야할 것인가가 쟁점이 될 것이다.

자립생활운동가의 말은 아마도, 장애라는 것 자체의 문제성을 부정한다기보다 그것을 고치기는 고치되 ‘알약’을 통해 나의 생물학적 특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외부’를 고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말은 단지 “난 비록 장애를 갖고 있지만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어”라는 자신감 혹은 당당함 보다 더 멋진 표현이다. 장애라는 것이 고칠 필요조차 없는 것이라는 ‘장애의 부정’이 아니라, 고치긴 고치되 바로 나의 ‘외부’를 고치는 것이 진정으로 무장애 상태로 나가는 것이라는 확신은, 장애가 가져다주는 삶의 무게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무게가 바로 내 ‘비정상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 수준 높은 ‘멋짐’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멋진 주장이 간과하는 한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통’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알약은 필요하다

장애와 질병은 보통 다른 것으로 인식되고, 이때 장애란 질병이 하나의 고정된 신체적 특성으로 굳어진 상태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척수장애를 입거나, 절단장애를 갖게 되거나, 또는 감각장애, 지적장애를 갖게 된 상태는 이미 그 자체가 그 사람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정신적, 신체적 정체성이 될 것이니 ‘질병’이라는 치료의 대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많은 만성질환, 희귀난치성 질환들은 어디에 해당되어야 하는가? 생물학적 손상을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하는 관점은, 종종 장애와 질병의 가운데 쯤 위치한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는 한다. ‘질환’이기 때문에 질병에 속하는 것인데, ‘난치성’이기 때문에 사실상 영속적인 하나의 신체적 상태이므로 ‘장애’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예컨대 다발성경화증 등은 어디에 속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질환들은 보통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어떤 질환은 근육이 뼈의 형태로 굳어지기도 하고, 끊임없이 신체 감각이 고통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런 상태는 분명 영속적이고 ‘치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장애’로 분류할 수 있다. 의료기술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장애담론은 희망적이고 생생한 이야기인가?

나 역시 장애가 있지만 일상적인 고통이 수반되지는 않는다. 물론 여러 가지 관리나 처치 등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항상 고통을 체험하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이 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며 안정된 자아임을 수용하고, 그것에 당당해지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끊임없이 고통을 경험하고, 불안정하고 위험한 생명상태가 지속되는 경우, 안정적인 의료지원을 갖춘다 하더라도 고통을 덜기 어렵고, 계속적인 심리적 불안과 공황이 찾아온다. 물론 주변의 노력과 사회의 지원을 통해 얼마간 이를 완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내밀한 체험이다. 자신이 아닌 한 외부에서 이를 완전히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사회적 변화를 통해 이 고통을 승화시키는 데에도 무리가 있다.

자립생활운동과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통해 확산된 장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혁신적이고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장애와 질병의 그 가운데에 있는,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고통의 영역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물론 고통역시 ‘사회적인 것’이라는 주장들도 있고, 그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이제 ‘장애담론’도 고통을 수반하는 신체적 심리적 상태의 존재들을 포괄할 수 있는, 좀 더 의미 있는 시도들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알약을 먹기보다 외부의 장벽에 집중하라는 말은, 때때로 더 불안정하고 내밀한 신체적 고통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희귀질환자들에게는 공허한 말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P.S : 시험을 핑계로 한 동안 칼럼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설혹 단 한 명이 이 글을 읽는다하더라도, 더 성실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20대 후반의 지체장애인. 태어나서부터 10여 년간 병원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특수학교 중학부, 일반고교를 거쳐 2003년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했고, 2009년부터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우주와 관련한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생물학 서적,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을 좋아한다. 스스로 섹시한 장애인이라고 공언하고 다니지만 가난하고 까칠한 성격에 별 볼일 없는 외모로 연애시장에서 잘 안 팔린다. 신이나 사람, 어떤 신념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자 노력중이다. 직설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화법을 종종 구사해 주변에서 원성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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