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역사가 학습되지 않고 전이 되지 않은 집단은 연속적으로 학대에 놓이게 된다. 공간의 통일성, 정치, 사회, 문화적 통일성은 집단이든 민족이든 실존적 배경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역사에 대한 단상을 E.H. CAR는 이렇게 얘기한다.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그 당대의 가치관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준은 역사가의 관점, 또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는 당대의 주관적 배경과 역사가의 정체성에 따라 역사는 과거의 의미를 뛰어넘어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중심내용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나는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염두에 둘 때 두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하나는 장애인운동의 역사가 기술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고, 또 하나는 기존의 쓰이고 있는 장애인당사자의 역사가 편협함으로 포장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이다.

왜곡

왜곡의 양상은 이러하다. 장애인이란 집단에 대한 접근은 본질적으로 생산관계에 설정되어 있지 않으니 최소한의 급부를 주기 위한 조치나 절차, 되지도 않은 신체에 대한 분석을 주를 이룬다. 이러한 역사관은 장애인당사자에게 결코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박애!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의 결과는 권리를 가진 한사람보다 무기력한 불구자에 더욱 집착한다. 무기력을 기준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써봐야 그것은 전문가나 대리인의 시각 일 뿐 장애인당사자의 역사성과 현재와 이후에 대한 전향적인 가치관을 발현시키는 데는 기본적인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그들은 장애인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절망이 가져오는 한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고는 한다. 장애 때문에 무엇을 못 하게 되는지, 장애 때문에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장애가 장애인당사자에게 얼마나 소중한 정체성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다. 장애의 정체성이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박애의 정신은 과도 할 정도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이쯤 되면 장애인당사자는 거의 종교 지도자 수준의 순결성을 요구 받는다.

신년 벽두부터 장총련과 장총의 신년 하례회를 분열의 양상을 넘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로 까지 확대해석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 양대 조직을 비판하려면 둘을 제외한 순결한 집단의 소중함, 그들의 정체성과 이후 전망이 소개되어야 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비판과 비난은 같은 것이기도 하나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대안 없는 비판이야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치부로 여기면 그만이겠으나 흙탕물이라 욕해놓고 어느 쪽도 참여치 않으면서 순결을 얘기하는 것은 오만이다. 적어도 장애인의 삶이 발전적이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현장을 평가하는 사람보다 실천하는 사람이 더욱 필요하다.

가렴주구(苛斂誅求 - 세금을 혹독하게 거둬들임)보다 더 혹독한 것은 비난만 일삼고 실천하지 않는 다수의 횡포다. 물론 이들은 박애의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해석되지 않으니 침묵은 방치를 낳고 방치는 학대를 낳는다. 연속적인 학대는 차별을 일상화하고 차별의 대상은 무기력하거나 자신에 대한 차별조차 불감증으로 체화한다. 무능력과 무기력에 대한 학습이 주를 이루는 대리인의 장애인에 대한 신체분석은 사회의 변화와 책임을 박애로 비켜선다.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장애인당사자가 치러내야 할 혹독한 대가이다. 보호, 굴종, 수용, 비정상, 내담자, 동정, 시혜, 대상의 질곡으로 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대리인들의 기호에서는 이것이 변화되는 것을 바리지 않는다. 결과가 권력의 이동이 될 테니 말이다.

장애인계의 도덕적 해이를 빌미삼아 현자의 흉내를 내려거든 최소한 장애인당사자의 비극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가렴주구에 집착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한적인 먹잇감을 취하기 위해 비도덕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장애인당사자의 실존에 분노해야 하는가? 대리인은 박애이고 장애인당사자는 도덕적 해이라는 괴기스러운 역사관은 도대체 어디에서 정반합을 설명할 것인가? 혁명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대리인은 평론가인가? 실천가인가?

장애인당사자에게 평론가는 필요 없다. 알량한 세치 혀가 세상을 변화시켰던 적은 적어도 빈자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흙탕물이라 해도 빈자와의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아름답다. 주류사회가 장애인당사자를 비난 할 만큼 도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비장애인을 뛰어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당사자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양상이 급부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내부의 오염

기간 장애인운동사는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꽤 많은 양을 출간했다. 다만 특정조직의 시각에서 객관성을 잃은 체 진행되었던 양상, 운동사 자체가 제도권에서 반겨 맞을 것이 아님으로 인한 사료의 부재, 권력의 불균형으로 인한 학습의 부재 등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 기본적으로 저항의 역사를 기술하고 학습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오히려 외국의 장애인운동사에 대해 더욱 긴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운동사의 인물들은 외국의 선배들이 그나마 질서와 존경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정조직의 이해관계를 떠나 질서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장애인당사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사자 간 질서와 주류사회와의 긴장은 후위로 밀리고 마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한국의 장애인운동사가 지속적으로 소개되거나 사료의 확보를 통한 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전문가나 대리인의 장애인당사자에 대한 분석이 장애인의 역사로 호도되고 있는 것은 더욱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역사가 학습되지 않는 집단은 지속가능한 발전에서 제외 된다. 외국의 경우 군소조직의 중간간부 정도를 만나도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국가의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줄줄이 꾀고 있으며, 이를 넘어 전 세계적인 장애인운동의 역사와 리더들에 대한 깊은 존경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장애인의 역사가 신체의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대리인의 역사라는 내부의 오염을 뛰어 넘어야 한다.

나가며

중증장애인이 성취해야 할 자립생활의 대의적 명제 역시 복지관, 시설, 자활기관 등으로 모양새를 바꾸어 지금까지의 장애인운동의 양상 데로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백번을 양보해도 그들이 활동보조인의 총량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 한 바는 없었다. 자립생활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당사자에게 학습의 기회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아니 알고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형식적인 기회만이 제한적으로 주어 질 뿐이다. 자립생활의 요체인 자조는 더더욱 발견하기 힘들다. 이쯤 되면 소비자주권이라는 최소한의 장치 역시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변화무쌍한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길목에서 정체성의 혼돈과 생존이라는 의제만이 대리인에게 유일해 보인다.

사회모델과 의료모델의 명확한 구분 없이 그동안의 백화점식 나열을 반복하려 한다. 대리인에 의해 자행되는 자립생활 서비스는 알량한 평가를 비켜가기 위한 양적평가에만 머무를 뿐 자립생활을 통한 질적인 성장과 공공의 개입을 촉구하는 일은 없다. 막장 드라마도 아닌 바에 장애인당사자가 일궈냈던 자립생활의 헌신을 박애와 의료모델로 회귀시키려 한다면 이는 과연 온당하다 할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장애인당사자를 제한적으로 참여시키고 민주를 했다고 자인했었던 그동안의 구태가 아니기를 바란다.

신년 모든 장애인당사자조직에서 장애인의 역사, 장애인운동사가 학습되고 전이되기를 기대한다. 운동사를 기획하는 모든 분들 역시 알량한 자료(대리인에 의해 기술된 자료)에 기대지 말고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했던 장애인당사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사료를 채우기 바란다.

장애인운동사 인명부가 발간되었으면 한다. 최소한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죽어나가기 전에 그 분들을 존경 할 기회를 우리는 후배 장애인당사자들에게 전이 시켜야 할 역사적인 책무가 있다.

양심적인 인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한적인 먹잇감을 전달하는데 그치지 말고 장애인당사자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북돋우기 위해 그들의 역사를 지지하고 그것이 실존임을 각인하기를 기원한다.

한사람의 장애인 리더는 수백 수천의 장애인당사자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킨다. 장애인이 변화해야 하는가?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진정성의 뒤안길에서 선택해야 할 유일한 가치이다. 그것은 장애인의 역사, 장애인 운동사가 될 것이다. 장애인 운동 인명부 편찬위, 아직 살아있으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을 적시하기를!

운동사를 당사자 조직 모든 교과과정에! 현안의 난제가 풀리지 않으면 과거를 기록하고 돌아보는 지혜를! 역사가 학습되지 않은 집단은 연속적으로 학대와 방치, 대상과 시혜적 조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진정성 있게 고찰할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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