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야모야병 같습니다.”

모야모야가 모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의사가 설명을 하는데 뇌혈관이 담배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나 뭐라나. 의사는 한참을 설명을 하는데 의사 말이 연기처럼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렸는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모야모야를 검색해 보니 수십 개나 주르르 뜨는 게 아닌가.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 통신을 하고 인터넷을 하면서도 모야모야는 처음 들어 본 말인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니. “내 병이 예사 병이 아니구나” 컴퓨터에 코를 박고 밤새도록 하나하나 살펴보니 가슴이 떨렸다. 희귀난치성질환 즉 고칠 수 없는 병이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이복남

모야모야병(もやもや病)은 뇌에 피를 공급하는 양쪽 내경동맥이 서서히 막히는 질환으로, 1969년 일본인 스즈키(Suzuki)에 의해 모야모야병(もやもや病)으로 명명되었다. 모야모야(もやもや)는 연기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는 뜻으로 뇌혈관 촬영에서 그물 모양의 가느다란 이상혈관이 연기가 올라가는 형태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국표준질병 상병코드 I67.5 모야모야 병(Moyamoya disease)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6년도 질병관리본부 희귀난치성질환 통계자료에 의하면 총 등록자는 2,819명이고 이중 남자가 1,035명, 여자가 1,784명으로 여자가 더 많다, 연령대는 10~19세가 543명(19.3)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40~49세 510명(18.1)이다.

희귀난치성질환을 얘기할 때마다 필자는 속이 편치 못하다. 희귀(稀貴)하다는 드물어서 진귀하다는 뜻이다. 희귀우표, 희귀보석, 희귀식물 등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인데 드물어서 약도 없고 고치기도 어려운 병을 두고 희귀병이라니, 맨 처음 이런 이름을 붙인 사람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백병원에서 왼쪽 뇌수술을 했다. 수축된 혈관을 확장하는 수술이었는데 수술 후에도 마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비가 오면 5~6분정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쉬면 마비가 풀린다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어 퇴원 후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모야모야병/국립보건연구원(2006년) ⓒ이복남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담배를 끊고 동명대학 도서관에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는 떨어졌다. 대체로 낙천적인 성격이라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는데 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노인들 모아 놓고 약장사 하는 곳에서 무엇을 잘못 드신 모양인데 가까운 병원에 가니 의사는 패혈증이라며 가망이 없겠다고 했다.

“제가 철들고 딱 두 번 울었는데 군에서 고참한테 맞았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입니다.”

어머님의 죽음을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어 백병원으로 옮겼다. 어머니의 치료비, 그리고 그의 수술비 등으로 용호동에 어렵사리 마련했던 아파트를 팔고 백병원 근처에 전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의 병간호는 이번에도 그의 몫이었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퇴원 무렵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한쪽 눈을 못 보셨다.

설마 어머니에게 전염이 되었을 리도 없는데 어머니의 시력이 상실됨과 동시에 그도 눈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안과에는 이상이 없고 왼쪽 시신경에 마비가 오고 있으니 이번에는 오른쪽 뇌수술을 해보자고 했다.

2007년 2월에 오른쪽 뇌수술을 했다. 팔 다리의 마비증상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했으나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혼자서 다니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신문이나 책, 컴퓨터 화면을 읽을 수는 없었다.

백병원의 담당의사가 서울에 모야모야병 전문 박사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마침 경기도에 살고 있는 자형이 집안에 일이 있어 내려 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함께 가보자고 했다.

점자 배우는 박영필씨 ⓒ이복남

의사를 만났고 수술을 하면 눈을 살릴 수가 있겠다고 해서 이번에는 전체 뇌수술을 했다. 마취가 풀리자 의사가 눈앞에 플래시를 들이대며 “빛이 보입니까?” 물었는데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의사는 6개월쯤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지켜보자고 했다. 그런가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시간만 죽였다. 한 달, 두 달, 석 달, 6개월이 지나도 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부모님은 속았다며 통곡을 했다. 이제 다시는 앞을 볼 수 없겠구나, 아무생각이 없었다. 눈도 깜깜하고, 앞날도 깜깜 할 뿐이었다.

친구가 인터넷에서 시각장애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 주면서 장애인등록을 하라고 했다. 2008년 1월에 시각장애 1급으로 등록을 했다. 그리고 지난 5월부터 친구의 안내로 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점자를 배우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대학에 편입해서 심리상담이나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은데 가능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더구나 수술 후 생각이 잘 안 나고,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단어선택에 어려움이 있고, 박장대소 즉 큰 소리로 웃을 수도 없다. 박영필씨, 비록 눈앞은 깜깜 하더라도 가슴에는 희망의 빛이 비쳐 원하는 공부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끝.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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