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함께 봤던 영화 <허브>.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내 생애 첫 극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가봤던 어둡고 이상한 냄새가 나던 동시 상영관이다. 간혹 필름이 끊겨 휘파람 소리를 듣곤 했던 그 곳. 당시 우리 집은 길가에 있어서 벽에 영화 포스터를 붙여주고 초대권을 받곤 했다. 그렇게 받은 초대권을 들고 어머니는 나를 업고 극장엘 가셨다.

이제 나의 어머니는 의식조차 없으시지만 2007년, <허브>를 보며 많이 우셨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그 다정했던 어머니는 지금 요양 병원에 계신다. 치매가 심하시다. 치매나 지적장애 모두 대뇌 질환 기능의 장애인데 지적 발달이 늦거나 정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꾸만 과거의 어느 한 순간으로 돌아가시는 어머니를 이제는 다 자란 내가 모시고 극장에 가곤 했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어머니에게 등을 빌려드릴 수가 없어 자동차에 모시고 자동차 극장으로 갔다. <허브> 는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본 마지막 영화이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그 당시만 해도 어머니는 감정을 포현하셨고 주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셨다. 어머니는 그 때 <허브>를 보시며 눈이 붓도록 우셨다. 그 땐 그러셨다. 지금처럼 병이 심하지 않으셨고 가끔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가셔서 그 전에 살던 집으로 가시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표현은 물론 의식조차 없으신 것같다. 그저 병원에서 숨만 쉬시는 정도이다.

가끔은 이제 그만 편안해졌으면 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나는 항상 어머니를 위해 기도한다. 얼마 전까지 그 기도의 내용은 오래 사시라는 희망이 아니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었다. 어머니 당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 이제 그만 편히 쉬시라는 기도였다. 내가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어떠한 반응도, 어떠한 소통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움직임도 없이 누워만 계시는 어머니를 보며 이제 그만 편안해지시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욕창이 심한 내 어머니의 몸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팠다. 고통스러우실 텐데도 아프다는 말씀 한 마디 못하시던 내 어머니.

그녀는 마치 동화 속 공주처럼 날씬하고 예쁘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허브>에 대한 글을 쓰려고 기억을 더듬다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 때 어머니는 <허브>를 보며 왜 그토록 눈물을 흘리셨을까? 주인공 상은은 스스로를 단지 지각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마치 동화 속 공주처럼 날씬하고 예쁘다. 종이접기를 잘하는 무늬만 스무살이면서 일곱살 소녀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상은. 그런 상은에게 사랑이 찾아올 때 엄마 현숙은 이별을 먼저 가르친다. <허브>는 엄마와 딸의 사랑이야기인 것이다.

동화 속 왕자님같은 교통 의경 종범(정경호)은 상은의 실체를 알고 떠난다.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진 상은의 신분증이 국제변호사 자격증이 아니라 복지카드라는 것을 알고 떠나 버린다. 종범을 다시 찾은 상은은 울먹인다. 하지만 종범이 “이 바보야,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연락을 끊으면 그건 헤어지자는 말이야.”라고 하자 상은은 엄마가 시킨대로 종범의 팔을 문다.

동화 속 왕자님같은 종범은 상은의 실체를 알고 떠난다.ⓒ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병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단어는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너무나도 듣기 싫었던 그 말. 친한 친구가 내게 무심코 '병신'이라는 말을 던져 싸웠던 적도 있다. 나에게 장애가 있기에 나는 그 단어에 민감하다. '바보'란 단어 역시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내가 '병신'이라는 말에 민감하듯 상은의 어머니 또한 '바보'라는 말에 민감하다.

그렇게 사랑은 끝나버리고 텅빈 가슴을 밥으로 메우려는 상은을 보며 엄마는 종범을 모질게 내친다. 상은이 살이 찌면 합병증이 생기고 죽고 만다며 더이상 고통을 주지 말고 떠나라고 한다. 그리고 불치병. 엄마는 상은의 홀로서기를 준비하며 1년 후, 2년 후, 3년 후……. 엄마가 없는 시간을 살아갈 상은을 위해 짐을 챙긴다.

엄마는 홀로 살아갈 상은을 위해 짐을 챙긴다.ⓒ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허브>를 다시 보며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나의 어머니도 마음 속으로 짐을 싸고 계실지 모른다. 표현도, 어떠한 동작도 하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홀로 남겨질 나를 위해 몇 번이고 짐을 싸고 계실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저며온다. 지금 이대로라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통 때문에 힘드시더라도 어머니가 나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다. 더이상 눈빛을 교환하거나 대화를 할 수 없어도 그냥 오래오래 살아만 계셨으면 좋겠다.

몇 년 전, 자동차극장에서 <허브>를 보시던 어머니는 애써 눈물을 참으시며 영화가 너무나 인위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참 많이도 서럽게 우셨다. 나도 눈물을 참으며 그냥 영화일 뿐이라고 애써 어머니를 진정시키며 안아드렸었다. 그 때 어머니는 참 작았다. 나를 업고 다녔던 그 분의 몸, 그 작아진 몸을 안으며 난 많이 서러웠다.

지나온 시간에는 항상 반짝이던 순간이 있다.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이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그리고 지금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다. 병원으로 모시던 그 때 우리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요양병원에 모시는 건 어머니를 편안히 해드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편하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 어머니를 뵈러 병원에 가보면 참 많은 분들을 만난다. 식구들은 처음엔 자주 찾지만 점점 발길이 뜸해진다. 간병하는 분들이 말한다. 그래도 병원에 계신 분들은 그나마 행복한 분들이라고.

오래 전, 어머니와 함께 보았던 <허브>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자꾸 눈물이 난다. 어머니의 기억은 지금 어디쯤에서 멈춰 계신걸까? 어쩌면 어머니도 우리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마음 속에서 짐을 싸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어머니 그냥 그렇게 살아만 계십시오.

상은은 엄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난 지각생 이예요. 난 시간이 많이 필요하대요. 시간이 많이 지나야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 진대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지면 그때 다시 만나요. 머리도 가슴도 멈추어 버리려 해요. 느리지만 어른이 될 때 까지 기다릴래요."

상은은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종범과도 이별한다. 그리고 '허브밭에 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을 믿고 엄마와 함께 갈 허브밭 소풍을 위해 열심히 자전거 연습을 한다. 그 자전거 위에서 어머니는 숨을 거둔다.

사람들은 때때로 불행 안에서 희망을 만난다.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살면서 불행은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불행 안에서 희망을 만난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들에서 불행이나 고난은 일상에 숨겨진 소중한 보물들을 찾아내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배종옥의 농익은 연기와 서정적인 영상미와 함께 이 영화가 주는 또다른 선물이 있다. 상은을 통해 '지적 장애는 지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던 감독의 마음이 기억에 남는다. 내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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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2기 장애인영화 칼럼니스트교실 수강생인 박대석씨가 쓰신 글입니다.

‘유토피아’는 2007년 장애인영화 전문칼럼니스트 강좌 수료생들의 모임입니다. 저희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장애현실을 살아가는 눈과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육체의 장애가 영혼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장애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 세상, 차이와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이 담긴 영화를 기다립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이제 영화읽기를 시작합니다. 有.討.皮.我. 당신(皮)과 나(我) 사이에 존재할(有) 새로운 이야기(討)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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