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를 마치고나니 IMF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보니 등록금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갔다 오면 IMF도 끝이 나겠지. 군대를 자원했다. 자동차 정비 기능사 2급 자격이 있어 수송부에 배치가 되었다. 11톤 유조차를 정비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아 타이어 하나 바꾸는데도 낑낑거렸다. 어느 날 정비장교가 그의 정비하는 모습을 보더니 “정비 잘 못하네. 니 혹시 컴퓨터 할 줄 아나” 군대는 원주에서 근무를 했는데 컴퓨터를 할 줄 아는 덕분에 행정병으로 빠져 군대생활은 편하게 한 셈이다.

대학교정에서. ⓒ이복남

제대를 하고 돌아와 보니 전자계산과가 정보처리과로 명칭이 변경되어 있었다. 등록금을 벌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학교에 근로장학생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등록금 마련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졸업을 하고 바로 취업을 했어야 했는데 취업을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담석증 수술을 하신 것이다. 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형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 어머니 병간호 할 사람이 없었다. 한 달 반 정도 병원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어머니 퇴원 후에는 이미 취업시기가 지나서 취업할 곳이 마당치가 않았다. 마침 예전에 컴퓨터 통신 나우누리에 공감지대라는 78년생 띠 동호회 친구가 일본 유학을 갔는데 연락이 닿았다. 평소 일본에 관심이 있었기에 오사카에 있는 그 친구를 찾아 갔다.

할 수만 있다면 일본에서 4년제 대학에 편입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어 어학원을 다녀야 되는데 어학원 입학조건이 한화 2천만 원 이상의 재정보증이 필요했다. 어디서 2천만 원을 구할 것인가. 돈을 벌어서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3개월 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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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에서 공감지대 회원들. ⓒ이복남

일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수소문 끝에 하나로통신 협력업체에 취업을 했다. 인터넷 설치 및 A/S기사였다. 2년 정도 근무를 했다. 당시 연봉이 1300만원 이었고 2년이 지나면 인상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자먼 2년이 지나도 월급을 올려 주지 않았다. 입사동기로 고등학교 선배하나가 있었는데 먼저 그만두었다.

“더 이상 있어봐야 무슨 비전이 있겠는가. 통신 짠밥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선배가 그만 두는 것을 보고 그도 회사를 그만 두고 친구와 같이 서울로 갔다. 고시원에 짐을 풀고 이력서를 쓰고 있는데 팔에 힘이 빠졌다.

팔에서 힘이 빠지고 마비가 오는 듯 한 증상을 처음 느낀 것은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였다. 한 1~2분 정도였는데 그 후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1년쯤 후에 밤에 보초를 쓰는데 또 그런 증상이 왔다. 그 때는 이상하다 싶어 군의관에게 얘기하고 CT를 찍었는데 별 이상이 없었다. 군의관은 자세한 것을 알아보려면 사제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병원에 가려면 휴가를 받아야 하는데 휴가 받을 형편도 아니었고 정작 휴가를 나왔을 때는 증상이 없어서 잊어버렸다.

노래가 좋아. ⓒ이복남

그런데 통신회사에 다닐 때 혼자서 차를 몰고 인터넷 설치를 하러 가다가 갑자기 마비가 오면 운전을 할 수가 없어 길옆에 차를 세워놓고 마비가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했더니 허약해서 그렇다며 보약을 지어 주었는데 차도는 없었다.

군대시절에는 1년에 한번정도였고 통신회사 다닐 때는 서너 달에 한 번씩 그러더니 고시원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그 주기가 점점 빨라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왔다는 느낌이 들어 취업도 포기하고 부산에 있는 형에게 연락을 했더니 형이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형과 함께 짐을 챙겨 부산으로 내려 왔다. 근처 병원에 가니까 잘 모르겠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백병원에서 CT와 MRI를 찍는 등 정밀 검사를 받았다.

박영필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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