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재미있다. <더 댄서> 포스터 ⓒ길벗영화사

몇 년전, 집시 무용수 호아킨 코르테스의 플라멩고에 반해서 한동안 재즈 댄스를 배운 적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힘을 발휘하는지 한 일 년쯤을 배우니 그제서야 춤이 눈에 들어왔다. 춤을 기억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이며, 동작을 연결하는 시선 하나하나에도 뜨거운 땀이 배어있음을, 음악이 시작되면 심장이 먼저 둥둥하고 세차게 고동침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더 댄서>의 포스터만 봐서는 평범한 춤 영화로 생각하기 쉽다. ⓒ길벗영화사

<더티댄싱>, < 빌리 엘리어트>, <쉘 위 댄스> 같은 웰 메이드 영화에서부터 밋밋한 이야기의 <스텝 업>이나 다소 선정적인 <쇼걸>에 이르기까지 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다. 춤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재미있다는 점에서 시대와 장르, 완성도를 떠나 대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춤을 통해서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휴머니즘에 기대어 성공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는데 뤽베송이 제작하고 프레데릭 가르송이 감독한 <더 댄서> 역시 그러한 범주에 드는 B급 영화라 할 수 있다.

나이트클럽의 댄싱퀸이 될만큼 춤솜씨가 뛰어난 인디아 ⓒ길벗영화사

듣기는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인디아(미아 프레)는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며 신산한 삶을 꾸리고 있다. 그녀는 브로드웨이 진출이 꿈이지만 뛰어난 춤실력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이유로 브로드웨이 공개 오디션에서 탈락한다.

수화를 열심히 배우던 친구로부터 청각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장애인으로 불리우는 것에 '반대'라는 말을 들었다. 듣지 못하는 것은 손상이나 결핍이 아닌 다른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디션 중에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인디아는 자신의 이름을 수화로 대답한다. 또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오던 인디아가 길거리 공연을 펼치자 가게 주인이 나타나서 그녀를 모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도 그녀는 수화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그딴 수화 난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라고 말한다.

인디아가 수화를 쓰는 순간, 장내는 얼어붙는다. ⓒ길벗영화사

이 때 수화는 소수자의 언어라는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데 만약 대다수 사람들이 수화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래도 인디아는 눈물을 흘렸을지 의구심이 든다. 인디아를 비롯,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장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사회요, 제도일 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지점이다.

수화는 소수자의 언어라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길벗영화사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실의에 빠진 인디아에게 자기장을 통해 소리를 연구하는 과학자 아이작이 찾아온다. 아이작은 실험이 잘 되지 않아 고전 중인데 자신이 하는 실험이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지, 어떻게 쓰여질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연구는 답보 상태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들른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인디아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자신감을 회복한 아이작. 아이작의 실험에 참여하게 된 인디아는 과학 기술의 힘을 빌어 춤으로 소리를 표현하고 더 나아가 소망하던 공연의 꿈도 이룬다.

인디아는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춤으로 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길벗영화사

이렇게 <더 댄서>에는 시선을 끌만한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인디아는

1)장애를 딛고

2) 파트너인 아이작이

3)만든 기계를 통해서 성공을 이루는데

그녀의 성공에 기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과학 기술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흥미롭다. 현란한 네온으로 꾸며진 무대에 선 인디아는 자신의 몸에 아이작이 만들어준 장치를 하고 춤을 춘다. 비록 성대로는 아니지만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인디아가 몸으로 부르는 한 편의 노래이자 음악이 되었다. 아름다운 춤과 함께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인디아의 기쁨을 지켜보는 일은 감동적이다.

인디아는 성대가 아닌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소리를 낸다. ⓒ길벗영화사

전동 휠체어 보유 대수가 3만 3천여대를 넘어섰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이동권이 보장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여러 시설들이 무장애 개념에 맞게 변화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전면적인 변화는 아니더라도 전동 휠체어의 보급은 장애인들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다보면 장애라는 개념을 얘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안경의 비유가 떠오른다. 안경 낀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또한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 과학 기술(기계)은 사람(장애인)을 얼마나 도울 수 있을까? 먼 미래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멋진 사이보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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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있는 사람을 장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사회요, 제도이다. ⓒ길벗영화사

*이 글은 쓴 김소영씨는 제2기 장애인영화 칼럼니스트교실 수강생입니다.

‘유토피아’는 2007년 장애인영화 전문칼럼니스트 강좌 수료생들의 모임입니다. 저희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장애현실을 살아가는 눈과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육체의 장애가 영혼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장애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 세상, 차이와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이 담긴 영화를 기다립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이제 영화읽기를 시작합니다. 有.討.皮.我. 당신(皮)과 나(我) 사이에 존재할(有) 새로운 이야기(討)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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