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성치 않아지면서 꿈이 점점 소박해진다. 장애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숙명, 내게 있어서 지금 가장 부러운 것은 진행 장애가 아닌 고착장애이다.

여름과 가을이 다르고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오늘의 몸 상태가 틀리다.

지난겨울, 지팡이를 의지하고서나마 이동에 큰불편이 없었는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어느덧 휠체어에 앉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걷는 행위, 쥐는 행위는 신체 언어의 기본이다. 자신의 의사로 손과 발을 통제하던 기본적인 신체언어 시대가 끝나고 난 다음의 세상은 이미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어제 잃어버린 발, 오늘 잃어버린 손, 먹고 말하는 기능의 저하 등 떠나가는 급행열차처럼 아득하게 몸의 능력을 상실하면서 나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 되고 말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누워 보내는 침대위의 세상은 고요하다.

손님처럼 가족들이 왔다가 떠나가는 나의 침대는 늘 고립무원. 행동반경을 벗어난 TV 리모컨의 위치는 불과 내 손끝에서 한 뼘 위. 하지만 내손이 닿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다. 목소리의 기능이 없어지면서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려워졌고 침대는 점점 나만의 세상으로 고립되는 느낌이다.

나는 꿈을 꾼다. 지금 이정도로 장애가 멈춰 주기를 말이다.

나는 꿈을 꾼다. 아직은 기능이 남아있는 내 손가락으로 제어할 수 있는 침대, 나의 방, 나의 집을 말이다.

여름부터 겨울이 오도록 반쯤 죽은 목숨으로 지냈다. 이른바 와상 장애인이 된 것이다. 고귀한 인간성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성을 잃고 싶지도 않다. 단지, 침대 위의 인생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나와 같은 와상장애인들이 장애를 이겨내고 스스로 일상을 해결하는 방법이 세상에는 정녕 없단 말인가.

나는 지난 봄에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를 방문하여 와상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잠시 그때의 글을 인용해보면 - ‘전동침대. 전후좌우 상하의 조절이 가능해서 와상장애인들에게 필수적인 적절한 자세변환이 가능하고, 욕창을 방지하는 공기 순환식 에어매트가 있다. 장애당사자가 침대에 누워 창문, 커튼, TV, 전화 등 일상의 많은 것들을 원터치로 통제 가능하게 되어있다. 천장에는 이동용 리프트가 달려있어 레일을 타고 움직일 수 있어 중증장애인도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 영위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컴퓨터 조작만으로 가능하게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라고 했었다. 즉, 이미 지원센터를 포함한 관련 당국은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손을 놓고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시대가 진정 복지사회를 향해 나가는 것이라면 시대를 만들어온 참여자의 한명으로 강력히 요청한다. 모든 복지예산의 최우선에 와상장애인을 위한 예산을 책정하여 침대에 누워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배려해주길 바란다.

누워서 바라보는 천장이 지겹다. “나 돌아갈래” 를 목이 메도록 외친들 좋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침대에서 나마 누인 몸 한번 세워 보는 것이 소박한 내 꿈이다.

1958년 서울 출생. 초등학교 시절, 전후 베이비붐 1세대답게 오전반 오후반을 넘어 저녁 반까지 나뉠 정도로 유달리 많은 또래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늘 그렇듯 살아간다는 것은 주연과 조연의 적절한 배치. 안타깝지만 그 많은 또래들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는 그림자 인생이었다. 많은 이들이 시대의 훈장으로 여기는 민주화 시절도 공중전화박스에 숨어 지켜보는 것으로 흘려보냈고, 그때의 투사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섰던 참여정부의 시대도 내게 주어진 역은 노동과 식량을 바꾸는데 익숙한 도시노동자.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주연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들에게 글을 읽는 작은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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