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안내견을 보고 좋아하는 아이들. ⓒ노컷뉴스

'장애인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신체의 기능적 이상이 있지만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상호관계에 제약을 덜 받는 사람과 신체의 기능이 정상이어도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상호관계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 중 어떤 부류를 중증 장애인으로 규정해야 마땅할까?

장애인들 중에서 큰 성공을 이룬 인물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장애를 극복하고 어려운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라는 찬사가 뒤따른다. 다시 이 극복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악조건이나 고생 따위를 이겨 냄'이라 되어있다. 즉 장애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의 정도에 따라 규정되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제대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장애를 야기하는 원인들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한 국가에 이러한 기준을 잘 이해하고 있는 구성원들과 지도자가 많이 출현할수록 복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가장 특화된 질적 서비스지만 여전히 일반화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대한민국의 장애를 인식하는 현실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그럼 시각장애인을 중심으로 하여 장애의 원인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그리고 안내견을 사용하기 위해 각 요소별로 체크 포인트를 아울러 설명하겠다.

첫째, 질병 및 재해에 의한 신체의 손상 정도에 따라 장애가 구분된다. 기본적으로 장애는 신체의 일부가 얼마나 손상되었는가의 정도에 따라 객관적인 근거로 활용 가능한 등급 기준을 두어 나누고 지원의 방향을 결정한다.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는 신체의 손상 범위에 따라 명칭(시각장애, 청각장애, 정서장애 등)을 부여하고 결함의 정도에 따른 수준별 등급을 나누어 명시하고 있다. 등록된 모든 장애인들은 위의 법에서 정한 기준에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받게 되는데 중증에 가까울수록 지원의 요소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확실한 만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된다.

안내견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시각장애의 정도는 법적 등급과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보행에 요구되는 시력의 기능성을 안과에서 측정하는 시표의 결과치로 모두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전혀 볼 수 없는 전맹은 물론이거니와 저시력 가운데 본인의 잔존시력이 보행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시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서비스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좁아진 시야로 인해 주변부를 볼 수 없어 계단 또는 옆에 있는 장애물을 파악하기 곤란한 경우 햇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눈을 뜰 수 없거나 반대로 야맹증으로 인해 흐린 날 또는 어둠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상황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진행성 안질환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경우 안내견과 미리 호흡을 맞추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둘째, 수용과 체념 간의 불균형 상태를 야기하는 심리적 문제는 장애 정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느 국가든 장애인의 숫자는 정확히 밝혀낼 수 없다. 기능적으로 신체 일부에 손상이 있어도 본인이 이를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범주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 및 기타 구성원에 의해 장애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현재 정부 현황자료는 단순 참고물에 불과하다.

명백한 기능적 이상을 스스로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장애인으로 볼 수 있을까? 물론 이 물음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에 따른 고유적 특성으로 간주해야 할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애를 수용하지 않는 경우 교육권을 보장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진로 탐색 및 직업 선택과 유지를 위한 복지 재활 서비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인간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침해당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끊임없는 정체성 논란에 휘둘리게 되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에도 걸림돌이 되는 경우를 맞이하기도 한다.

반면 장애를 지나치게 수용한 나머지 체념 상태에 빠져 대체기술을 익히기 위한 노력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무기력 또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거나 교육 및 재활을 위한 개인의 의지가 부족하여 독립성을 저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한 예로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확대됨에 따라 일부 시각장애인들은 이를 활용하여 외부와의 소통 기회를 늘려갈 수 있게 되었지만 도움의 손길이 오히려 시각장애인의 독립적 사고를 지나치게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 또한 크다.

이와 같은 장애를 대하는 개인 및 주변인들의 극단적인 태도는 장애인 당사자를 고립된 환경에 처하게 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므로 적절한 시기에 맞는 적합한 교육 및 복지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면 기능 손상에 관계없이 장애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다시 안내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간혹 안내견을 집에 두고 흰지팡이를 들고 나설 때가 있다. 이 때 안내견이 앞서서 장애물을 피해주던 편리한 보행 패턴 대신 직접 장애물을 흰지팡이로 탐지하면서 가야하는 패턴으로 돌아가려니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답답한 것은 그런 나를 지켜보는 주변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시선들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큰 심적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은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 결국 혼자 길을 걷지 못하고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주변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은 가교와 같은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필자가 안내견과 길을 나서면 오히려 혼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이상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만족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주목의 대상이 호기심과 의혹을 담고 있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신기하면서도 기특한 '안내견'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섭섭할 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채송이와 먼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그제야 곁에 어이없이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것 정도.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어 올바른 방향으로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안내견은 아주 오랜 역사 현장에서 부터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해 왔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그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이 겪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역경들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정부 대책 수립, 가족 지원 서비스, 특수교육 및 사회복지 현장 등)에서 심리적 문제가 등한시 되고 있는 현실을 접할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다. 장애인들이 지닌 기능적 손상에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앞서 그들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 모색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바람대로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인권을 되찾을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안내견의 숫자는 더욱 더 확산될 것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심리적 변화에 가장 폭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변화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가들 또한 이 점을 결코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장애의 유무와 정도가 결정된다. 시대 또는 문화의 차이에 따라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모든 구성원이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던 원시 부족사회에서의 장애인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졌으므로 분리 및 격리의 대상이었다. 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표되는 고대 서구 문화권에서는 장애인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자들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중세 기독교 사회는 장애인을 위한 사회 보호시설을 만들어 분리 시스템화 하였고, 17세기 이후에 들어와서야 시각장애인들의 사회적 진출의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각장애인의 사회적 역할이 달라져 왔다. 삼국유사에는 가족의 보호 아래 생활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모습이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주도의 점술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술과 침구술을 교육하고 직업을 보장해 주었으며 현재는 극소수이기는 하나 교사, 종교인, 복지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큰 맥락에서의 태도의 변화는 문화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인식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장애인을 규정하는 가장 큰 잣대가 된다. 즉 '헬렌 켈러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하는 물음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그녀의 노력과 투지로 일궈낸 일련의 결과가 성공에 이르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바로 그녀를 성공에 이르게 만든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더욱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미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위해 제공되는 모든 교육 및 복지 서비스, 사회 통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장애를 지닌 대상의 삶을 결정짓는 것을 단순한 기능 이상과 심리적 문제로만 취급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철학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이 합당함을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하여 호의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장애인 당사자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분리된 환경에서 통합된 환경으로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의 형태가 변화된 것은 장애인 당사자의 성공 여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시 안내견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한민국이 미국 또는 가까운 일본에 비하여 안내견을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의 수요가 급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활동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안내견으로 인한 보행의 편의성은 인정하나 그러한 편의성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사회 무대가 협소하다는 현실이 시각장애인들로 하여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즉 안내견에 대한 일반 사회의 부당한 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부당한 인식 문제의 근본적 대상을 안내견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안내견과 함께 택시를 탔다. 일부 기사들이 안내견의 탑승을 거부할 때가 있어서 마음을 졸이곤 하는데 이 날 기사 분은 아무런 주저 없이 탑승을 시켜주었다. 택시 안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한 의미를 안겨다준 대화였다.

"기사님, 원래 개를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개를 데리고 있는 손님이 보이면 일부러 안태울 때도 있습니다."

"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큰 개를 데리고 있는 저는 태워주셨습니까? 저는 기사님께서 개를 좋아하셔서 당연히 태워주셨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손님보다 큰 개를 먼저 발견해서 처음에 놀라긴 했죠. 그런데 다시 보니 앞을 못 보는 분이더군요. 그럼 당연히 개가 있든 없든 태워야죠. 택시는 사람을 태우라고 있는거니까요."

"그래도 개가 싫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셨잖아요?"

"물론 보이는 사람이 개를 데리고 있었으면 그렇게 했죠. 왜냐하면 그건 개와 사람을 태우는 거니까 당연히 개를 싫어하면 안 태울 수도 있는 문제죠. 그런데 손님과 안내견은 다르죠. 저는 지금 사람 둘을 태웠다고 보거든요. 안 보이는 사람 안내할 정도면 그걸 어디 짐승 취급할 수 있나요, 그런데 좀 털이 많긴 하네요. 하하~"

기사님의 마지막 한 마디는 큰 충격이었다. 안내견을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하거나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안내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반 사회의 인식 부족으로 간주하곤 했다. 그러나 일부 집단 또는 공공장소에서 안내견을 거부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즉, 그 책임을 안내견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그들에게 우리 인간들이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내견 활동이 보편화된 선진국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를 싫어하고 혐오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내견의 활동이 우리나라와 같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개를 보기 전에 사람을 먼저 볼 수 있는 가치관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시각장애인 모두가 안내견을 필요로 하거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릇된 인식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는 안내견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일들은 단지 안내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시각장애인 당사자의 인권과 직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 가운데 안내견을 선택하기에 앞서 과도하게 사회적 활동의 제약을 걱정하는 일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현실을 외면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장애인의 사회적 위치가 변화된 배경에는 현실을 뛰어넘는 높은 가치 실현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시도가 뒤따랐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들은 장애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손상의 정도뿐만 아니라 장애의 수용 여부,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려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결정된다. 즉 한 장애인을 둘러싼 개인 및 가족, 사회, 국가, 문화 등 어떤 한 요소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장애인에 대한 문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이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 가운데 안내견이 있다.

선천성 시각장애로 특수학교(대전맹학교)를 나와 2002년 창원대학교에서 특수교육과 사학을 복수전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첫 안내견 강토와 만나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수준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방의 열악한 현실에서 안내견 강토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일깨워 주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지난 2005년에는 삼성화재 공익광고에 출연하여 대한민국광고윤리대상을 수상하였고, 안내견에 대한 대중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 삼성화재안내견학교에 입사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홍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 및 안내견 인식개선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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