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어느새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가을은 우리들을 집안에 가만히 두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특히 주말에는 가족이나 연인들이 이런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통에 도로는 자연스럽게 주차장으로 변하고, 산은 단풍 반, 사람 반으로 꽉차버린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길을 나서는 걸 보면 가을이 좋긴 좋은가 보다.

영화 '가을로' 포스터. ⓒ영화세상

이런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를 한편 소개할까 한다.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다뤄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던 영화 ‘가을로’이다.

잠깐 내용을 소개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현우(유지태)와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김지수)는 쇼핑하기 위해 삼풍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민주가 있는 약속장소로 가던 현우는 눈앞에서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온 몸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열심히 민주를 찾아보지만 그 어디에서 민주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10년 동안 현우는 민주를 죽음으로 내몬 죄책감과 민주를 잃어버린 상실감 속에서 웃음을 잃어버린 냉정한 검사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현우가 맡고 있던 사건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단기간 휴직처분이 내려지게 되고, 그때 현우에게 한 권의 다이어리가 도착하게 된다. 바로 민주가 신혼여행을 꿈꾸며 적었던 여행수첩이다.

붕괴현장에서 찾은 현우와 민주가 찍은 사진 한 장. ⓒ영화세상

현우는 다이어리 한권을 들고 다이어리 속의 민주와 하나가 되어 여행을 하게 된다. 우연하게도 현우가 가는 곳마다 어떤 한 여자를 계속해서 목격하게 된다. 그 여자, 세진(엄지원)은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지하카페 종업원으로서 현우를 기다리고 있던 민주와 함께 매몰되었었는데 민주의 여행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여자다. 현우와 세진은 그렇게 함께 여행을 하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던 아픔을 보상받게 된다.

사고가 있기 전 현우와 민주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영화세상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정신장애인이 나온다. 한 명은 ‘병적애도 현상’을 가진 현우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민주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민주를 떠나 보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온 현우는 삶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감정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간다.

나머지 한 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세진이다. 붕괴사건의 충격으로 10년 동안 항상 불을 켜놓고 잠을 자야하고, 터널같은 갇혀있는 공간에 있으면 늘 불안해지고, 공포에 질려서 살아간다. 세상과 점점 단절되어 가는 세진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오히려 더 힘들어 한다.

민주의 신혼여행 다이어리를 가지고 여행지를 찾아가는 현우. ⓒ영화세상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한 사건들로 인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미국의 경우 9.11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조치를 취했던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였다. 미국은 외상 후 스트레스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건, 사고가 난 뒤 일어날 후유증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이후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사건, 사고에 대한 대처에만 신경을 쓰지 그 사건, 사고로 고통 받을 사람에 대한 대처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건을 보더라도 그렇다. 기름유출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는 뉴스내용을 접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911테러사건 현장 @2002 퓰리처 수상작

세진에게 현우에게 정부차원이든 민간차원이든 간에 지속적인 상담과 관심이 있었다면 그렇게 10년이라는 기간을 고통 속에서 살지 않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어쩌면 살아남아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는 세진. ⓒ영화세상

이들에게 여행은 단순히 단풍구경을 떠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자신을 직면하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통해 자신과 직면하게 되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의 추억으로 점점 변해간다. 아니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현우와 세진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간다. ⓒ영화세상

끝으로 세진이 현우에게 하는 말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속에 나무숲들이 가득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2007년 장애인영화 전문칼럼니스트 강좌 수료생들의 모임입니다. 저희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장애현실을 살아가는 눈과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육체의 장애가 영혼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장애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 세상, 차이와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이 담긴 영화를 기다립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이제 영화읽기를 시작합니다. 有.討.皮.我. 당신(皮)과 나(我) 사이에 존재할(有) 새로운 이야기(討)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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