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아는 생명의 기원, 삶의 근간을 바탕으로 하는 힘을 뜻한다. ⓒ이상호

초아(草芽)

풀의 싹 ; 생명의 기원, 삶의 근간을 바탕으로 하는 힘을 뜻한다.

은영은 재벌의 딸이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명문대에 입학하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일에 불과했다. 그녀가 왜 지방 캠퍼스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하긴 그녀가 이름만 대면 알아차릴 재벌가의 딸이었으니 학교는 대충 다니고 , 유학쯤의 코스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했다. 머리가 나빠 잔디를 깔고(비공식 기부금) 들어왔을 거라 했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지인들만 빼고 아는 이는 없었다.

홍수는 장애인이었다. 1지망은 연극영화과를 지망하였고 2지망은 국문과를 지망했었다. 당연히 그는 2지망이 운명이었다.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억울한 심정이었다. 홍수보다 훨씬 잘 생기고 끼가 넘쳤던 홍수의 친구도 연영과에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도 장애인이었다.

실기 시험을 보러갔던 지방 캠퍼스는 을씨년스러웠다.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아 여관은 차고 넘쳤으니 둘은 어렵사리 학생회의 도움을 얻어 학생회 실에 실기를 준비하며 며칠을 보냈었다. 홍수는 떨어질 것이 뻔하니 술만 마셨고 홍수의 친구는 나름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떨어질 것이 뻔하다는 것을 그 친구는 모르고 있었다.

실기는 이렇게 진행됐다. 심사위원이 제안한 퍼포먼스와 호흡, 준비한 대사를 짧은 시간에 진행하는 것이었다. 홍수는 그답게 초지일관 술자리를 연기했었고 홍수의 친구는 심사위원의 제안 데로 자판기에 커피를 빼 먹는 것을 실감나게 연기했었다. 짝지(목발)를 짚고 있었던 그는 짝지를 짚고 있는 상황에서 허리를 굽혀 잔을 빼는 장면이었다. 몇 걸음을 절름거리며 담배를 피워 무는 장면을 장애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서러움까지…. 그 짧은 시간에 토해내고 있었다. 난다 긴다 하는 심사위원들도 숨을 죽인 채 정적을 함께했다.

둘은 불합격이 적힌 벽문을 뒤로한 체 술잔을 마주했다. 홍수는 그럴 줄 알았으니 그저 희죽 웃었고 친구는 술잔이 몇 순배 떠돌던 자리를 눈물로 마주했다. 먼저 학원을 떠났던 그의 짝지는 겨울 한기를 함께 보듬고 있었다.

홍수는 어차피 졸업을 해도 취업은 안 될 것이나 시간이나 죽이자는 심정으로 2지망을 등록했다. 졸업은 어차피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장애인에게 백수의 길은 노정된 것이다.

교수님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불과 1학년 중간고사 과제로 식민지 조선의 문학에 대해 논하라는 과제를 내 주었다. 순진한 홍수였다. 그것은 시험을 대체해 점수를 주기 위한 교수님의 꼼수였고 애초에 그리 정성을 들일 것은 아니었다. 무려 50p를 넘길 정도의 과제를 제출했으나 결과는 C였다. 북한 문학을 지나치게 언급한 탓이었다. 교수님은 말했다. "야! 안기부에 제출하면 너는 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린다!" 홍수는 이후 공부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은 지적 호기심조차 사상의 편견 안에 가두고 있었다.

은영은 그동안의 티를 없애기 위해 있는 것을 다 버렸다고 했다.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밥도 함바집(공사장 인부를 대상으로 한 식당, 싸고 양이 많아 가난한 이들에게는 인기였다, 한 끼를 시켜 둘이 나눠도 배가 불렀다)만 찾았다고 했다. 아주 가끔 그를 찾는 낮선 풍경만이 그녀의 삶의 궤적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홍수는 우연히 경남의 애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행보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의 아비에게 그녀는 2년만 시간을 유예해달라고 했다. 홍수는 입이 무거웠다. 어려서부터 그의 어미는 다른 자식과는 달리 어미의 곁에만 맴돌 수밖에 없었던 홍수에게 집안의 슬픈 흔적들을 토로하고는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홍수는 이미 어른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입이 무거웠던 홍수는 선배의 말끝에 은영의 애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홍수는 은영을 알기 전부터 내심 앞을 보며 간극을 두었다. 어차피 닿지 않을 인연이고 나누어야 할 삶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게 된 은영은 홍수가 눈에 띄었다. 불과 1학년임에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과의 관계도 모든 후배들 보다 끈끈했다. 친하게 지내리라 마음먹었던 은영은 기회를 보아 홍수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홍수는 애써 자리를 피했다. 다른 사람과는 맛깔스런 대화를 주고받던 홍수는 유독 은영과는 멀리 했다. 어느덧 술자리가 무르익어 국도 주변에 있는 개 골목(그 골목을 나올 때면 개가 되도록 취하고 만다는 전설이 있었다)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뒤풀이 장소를 옮길 때 마다 홍수는 항상 맨 끝자리를 걷고는 했다. 걸음이 늦으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홍수는 애써 같이 걷기를 거부했다. 모두가 도착해 몇 순배의 술잔이 돌 때까지 홍수는 늦는 일이 많았다. 빠른 것은 느린 것을 불편해 하지만 느린 것은 빠른 것을 불편해 한다. 결국 권력의 문제다.

친해질 기회다 싶어 같이 걷기를 원했던 은영과 홍수는 국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웬일인지 홍수는 은영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그 멀고 길었던 길 내내 단 한 번에 눈길도 주지 않았으니 은영은 말 한자리 보태지 못한 채 홍수의 불편한 걸음만 쫓았다. 마침 저편에 동네 양아치들이 예쁘장한 은영을 보자 시비를 시작했고 홍수는 아무 말 없이 짱돌을 집어 들었다.

“학생! 우리랑 술 한잔 하지!”

“일 없으니 그냥 가셔!”

“어이! 절룩 다리! 짱돌은 뭐 하러 들었는데….”

그 순간 홍수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홍수는 짱돌로 자신의 머리를 쳤다. 술 취한 정신이니 머리를 친다는 것이 눈가를 치고 말았다.

“야이! 개 c - 8놈들아 어쩔 건데….”

“니네는 대가리에 철판 갈고 다니냐. 이 개자식들아!”

피를 뚝뚝 흘리며 허옇게 웃고 있는 홍수를 보고 건달들은 뒷걸음을 했다. 놀란 은영은 수건을 꺼내 지혈을 하며 병원가기를 종용했으나 홍수는 일 없다며 가던 길이나 가자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후 은영은 미안했기도 했고 홍수가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고 했다. 그 정도 일이면 무서웠을 만도 한데 은영도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왔던지 별 내색이 없었다. 선배들 놀라니까 없던 일로 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에 은영은 그리하자고 했다. 그날 아침이 오도록 찢어진 눈가를 동여매고 둘은 술잔을 함께 했다. 그날! 탁자위에는 술병이 쌓이고 앞마당에는 눈이 밤새 내렸다.

그렇게 홍수와 은영은 만났다. 홍수는 은영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다만 묻지 않았다. 홍수는 곧이어 은영에게 애증이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침 가난했던 선배의 은영에 대한 연정이었으니 과정과 결말이 눈에 선했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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