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회장 임성현)이 장애인의 개별욕구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삶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 공모를 진행했다.

이번 공모에는 협회 소속 시설의 이용장애인과 직원이 총 53편의 우수사례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시설거주 장애인의 삶의 이야기가 담겼다.

협회는 외부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으로 최우수상 1편, 우수상 3편, 장려상 2편, 우수작 3편 등 총 12편을 선정했다. 에이블뉴스는 수상작을 연재한다. 첫번째는 최우수상 ‘제2의 삶’ 이다.

제2의 삶

백민지(로뎀)

제1의 삶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대한민국 충남 어딘가에서 태어났단다. 5살 때부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설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내 상태가 가장 심했고, 물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축구장도 야구장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고,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날이 그날 같고 나는 평생 이렇게 살다가 여기서 죽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는 사이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나도 나가서 살수 있다고 이야기 했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속 저편에 숨겨진 희망의 씨앗이 꿈틀거렸다.

그러던 중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역단체의 도움으로 28년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내 인생의 반전 ‘첫인상’

처음 간 로뎀은 산 속도 아니고 한적하지도 않고 도로 한복판 빌딩건물이었다. 설마 이곳이 시설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무실만 있고 시설은 따로 있겠지? 라는 내 생각은 빗나갔고 그곳은 정말 생활 시설이었다.

나는 넉살좋게 내 집인 냥 바닥에 눕혀 달라고 요구했고 양말까지 벗고 시설 구경에 나섰다.

로뎀은 집안에 나무 한그루 심어 놓은 아파트 같았다. 나는 그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왠지 모르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원장님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으신 분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민지 씨는 감각도 있고 의사표현도 할 수 있는데 왜 기저귀를 하고 있나요?’ 너무나 의아한 듯 물어서 속으로 생각했다.

변기에 앉을 수도 없고 매일 누워있는데 기저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원장님이 더 이상했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원래부터 기저귀를 하고 있었어요.’ 당황하는 모습이 영력한 원장님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기저귀를 때 봐요’라고 이야기했고 ‘예’라고 대답해지만 ‘얼마나 갈까? 도로 기저귀를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도전

드디어 로뎀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약속대로 기저귀 대신 속옷을 입고 말이다.

나도 처음이고 선생님도 처음인 낯설고 난감한 상황에 봉착 했다. 누워서 소변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소에 남자 같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서 일까? 나의 소변은 예상치 않은 곳으로 마구마구 날아갔다.

시설에서 준비해준 스텐변기는 안그래도 도두라진 나의 꼬리뼈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역시나는 기저귀가 맞는구나 생각했다.

이만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새로운 변기통과 소변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노트북이 생겼다. 중고였지만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듣고 음악도 듣고 마냥 좋았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것이 끝나면 누군가가 다시 도움을 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어 늘 아쉬웠다.

정령 나는 혼자서 컴퓨터를 할 순 없을까? 어느날 무심코 선생님에게 던진 이 한마다가 슬프고도 놀라운 파도가 되어 거세게 나를 칠 줄 몰랐다. 입조심 할걸~

선생님 : 한번해볼까요?

백민지 : 예? 어떻게요?

선생님 : 발로 열 번을 두드리면 한번은 켜지지 않겠어요?

백민지 : 그러다가 노트북 부서져요

노트북에 전원버튼이 내가 발로 누를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변신해 있었다. 발로 계속 눌러서 일까? 노트북은 오래 살지 못했다.

그 후로 선생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힘들게 핸드폰 작동하는 모습을 동영상을 담더니 경기도에 다녀왔단다.

나에 맞는 마우스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 나의 마우스 찾는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안구로 클릭하는 마우스는 땡! 입으로 부는 마우스 땡! 초성만 찍어도 단어가 나오는 자판 땡! 쓰디 쓴 맛이나는 혀로 누르는 고무자판 땡! 드디어 해성같이 나타난 나의 사랑 트랙볼~ 딩동댕!

새로 나타난 마우스 트랙볼은 나를 미치게 했다. 이제 혼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인터넷과 홈쇼핑에도 눈이 띄어 아주 잠깐이지만 사치녀 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1분이면 쓸 수 있는 간단한 문장도 나에게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다 보니 온몸은 땀에 젖었고 안 그래도 약간 휘어있는 척추와 살이 빠지는 속도 때문에 선생님들이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다고 맨날 놀기 만하는 것은 아니었다. 컴퓨터를 혼자 할 수 있게 되자 동료 상담이라는 소박한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매달 일지를 쓰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지만 조금이나마 돈을 직접 벌 수 있어서 또 다른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

진짜쇼핑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이 나랑 옷을 사러 함께 가자고 하셨다. 나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그곳에 가서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눈에 담고 있는데, “민지 씨, 이거 한번 입어 봐요” 선생님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을 하며 “네” 라고 했다. 나는 주로 눈으로 보거나 다른 사람이 사다주는 옷을 입어 버릇 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매우 낯설고 난감했다. 내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이 나의 옷을 벗기고 입히고를 반복하였다.

처음엔 조금 귀찮고 힘들었지만 나보다 선생님이 더 힘드실 텐데 즐거워하시고 나도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보고 샀다는 것이 뜻 깊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어보고 살 수 있는 거구나’ 라는 걸 알았다. 지금도 그 때 산 옷을 보며 그 날 가졌던 느낌과 생각을 되새기곤 한다!

여행을 즐기고 있는 백민지씨.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

무작정 여행

나는 주로 단체로 여행을 갔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편에는 계획도 없고 일정도 없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녀봤으면 하는 그런 작은 소망이 있었다.

그 날은 꿈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민지 씨, 우리 여행 갈까요?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얘기 해봐요” 이곳에선 하도 놀랄 일이 많아서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아는 지인이 하동에서 펜션을 하는데 거기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갑시다!!!” “저 혼자요?” “아니요 다른 친구도 한 명 같이 갈 거에요” 그렇게 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아는 지인한테 가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니 저녁이 늦어졌다.

진주에서 유명한 냉면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늦은 시간에도 사람이 많아 주차를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어 대전에서 냉면 먹으러 왔다고 이야기 하자 드디어 들어갈 수 있었다. 식당 안에도 사람이 많았다. 내가 지쳐서인지 냉면은 그렇게 맛이 없었다.

때마침 등 축제 기간이라 보고가자고 하였다. 바로 출발~!! 여러 가지 모양의 예쁜 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 축제도 좋았지만 그 늦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 순간을 만끽하고 하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숙소도 못 정한 우리는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진주에는 등축제로 숙소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남해쪽에 ‘아라클럽’ 이라는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이름이 조금 독특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곳은 정말 멋진 곳이었다. 방에서 바닷가가 보이고 2층에도 침대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예쁘고 우아한 것이어서 보고만 있어도 만족스러웠다.

나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남해에서의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일찍 내 눈을 흔들어 깨웠다.

내가 머문 집은 해돋이가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이렇게 편안한 자세로 일출을 보다니! 나는 눈이 시리도록 일출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최첨판댁 등 여러 곳을 다녀왔다. 아쉬운 여행이 끝났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번의 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두근 혼자서 해 보기

나는 로뎀에 와서 본격적으로 외부의 여러 기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설 장애인들은 활동보조가 없어서 나갈 때 마다 가까이에 사는 지인과 함께 외출을 하곤 했다.

그러나 지인들이 항상 나를 위해서 약속을 비워줄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나는 콜택시도 예약하고 센터에도 이미 나가기로 했다. 갑자기 나와 동행을 하기로 한 지인이 약속이 생겨서 못 온다고 연락을 해왔다.

차도 취소하고 센터에 못 간다고 할까? 아니면 한번 혼자 나가볼까?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혼자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조금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씩씩하게 선생님께 “오늘은 혼자 가야해요. 차비 좀 내주세요.”라고 말했더니 혼자 괜찮겠냐고 염려하셨다.

걱정하시는 선생님을 안심시키고 도전한 나의 첫 외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렇게 한 번 혼자 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간 나는 점점 혼자 나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경미한 사고가 났다. 내 인생의 첫 교통사고였다. 나는 사고도 사고지만, 이제 혼자 바깥에 못 나갈까봐 기사님의 ‘병원에 가자’라는 몇 번의 권유도 뿌리쳤다.

하지만 사고는 사고였다. 내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센터에 계신 분들과 병원에 가게 되었다. 로뎀 선생님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계셨다.

나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았는데…. 다들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는 다행히 짧은 입원을 마치고 로뎀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또 혼자 나갈 일이 생겼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못나가게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허락해 주셨다.

“진짜 혼자 나가요?” 몇 번이고 확인해 물으니 “사고는 누구나 날 수 있다”고 얘기해 주셨다.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나도 보통사람들이랑 똑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 후로 나는 시설장애인도 활동보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았기 때문에 뇌병변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시설장애인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데 함께 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발표하기도 했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꼈다.

백민지씨가 놀이기구 바이킹을 타고 있다.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

바이킹 타기

로뎀에서 캠프로 에버랜드를 간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식구들은 누가 봐도 대부분 와상장애인이 많다.

나도 이곳에서는 경증에 속한다. 내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데리고 에버랜드를 가다니. 솔직히 ‘제정신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좋았다.

모두가 가기도 쉽지 않았다. 버스에, 트럭에, 봉고에, 차라는 차는 다 출동한 것 같았다. 그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내가 바이킹을 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자가 내 몸 상태를 보고 위험해서 못 타겠다고 했는데 같이 간 로뎀 선생님들과 내 의지를 합하여 그 관계자를 설득해 바이킹을 탔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에도 그곳을 갔는데 이번에는 바이킹보다 더 위험한 놀이기구를 탄다고 해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해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도전

시설의 분위기에 맞추어 점점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가고 있었다. 혼자서 2박3일의 동료상담가 교육, 자립여행 등 외박도 서슴치 않았다.

나 혼자 외박하는 것 자체가 누가 봐도 불가능하고 나 또한 그럴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두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연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건 아니였다.

매번 낯선 사람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일일이 부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지원했지만 낯선 손길은 나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많이 부족했고 혼자서 몰래 눈물을 훔치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나보다 더 경증인 다른 사람은 활동보조와 함께 다니는데...’ 시설에 있다는 이유로 지원받지 못한다는게 불공평하고 억울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시설에서 왔다고 하면 거듭 되물었다.

진짜? 시설에서 왔어요? 이곳저곳에 갈 때마다 만나는 사람은 내가 장애인활동가인줄 알기도하며 의야하게 생각했다. 한편으론 시설에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돼나? 생각했지만 그만큼 지역사회에서 활동을 하지 않고 있거나,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에게는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지만 나에겐 자립이 그렇다. 놓치기는 싫고 잡자니 무모한 도전 같은 그런 단어이다.

자립이라는 단에서 조금씩 손을 뻗어가고 있을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자립지원센터에서 나에게 함께 자립을 준비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덥석 그 손을 잡고, 누가 뭐래도 그 손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준비되어있는 않은 자립지원센터는 너무나 쉽게 나의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믿음에 대한 배신과 상처 때문일까? 자립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었다. 자립축하파티도 하고 이제 나갈 일만 남았었는데... 함께 울어주고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로뎀 선생님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번의 실패가 나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였다. 그것이 있었기에 나는 좀 더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설렘과 막연한 환상의 자립이 아니라 내가 부딪치고 헤져 나가야하는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이제 난 조금이나마 안다. 좌절도하고 많이 울기도할 것이다. 이 또한 나의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그만하면 살기좋은 곳인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수도 없이 질문을 한다. 간단하게 대답한다. 누구나 그렇듯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이니까~!

마지막으로 로뎀에서 쓴 나의 자작시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양파깍지

백민지

남은 콩깍지가 씌인다는데

가래를 잘 뱉어서

이쁘단다

콩깍지가 씌인다는데

응가를 잘 해서

이쁘단다

콩깍지가 씌인다는데

아무 표정 짓지 않아도

이쁘단다

콩깍지가 씌인다는데

못알아듣는 소리를 내도

이쁘단다

누가 벗기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양파깍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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