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선생이 한 번 나와 보라고 했다. 그때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 음악학원은 종합학원이었고 옆방에서 나는 소리는 바이올린 소리였는데 그때만 해도 '바이올린'이라는 발음도 잘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1년쯤 지났을 때 그는 자꾸만 옆방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끌렸다. “한 번 만져 볼래?” 학원 선생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바이올린을 만져 보게 했다.

김지선 : “바이올린은 너무나 이상하게 생겼고 그런 악기가 소리를 낸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어린날의 김지선씨. ⓒ이복남

선생에게 해 보겠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은 피아노 그리고 또 한 시간은 바이올린을 배웠다. 피아노는 건반을 익혀 치면 되는데 바이올린은 피아노하고는 많이 달랐다. 제일 먼저 악기를 잡는 자세부터 시작해서 운지법 활 잡는 법 등을 배웠다.

김지선 : “처음에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악기 잡는 자세는 지금도 교정을 받고 있는데 눈 감은 사람들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바이올린은 악기를 잡는 자세가 달라지면 소리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켜는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음으로 바이올린을 켜다가 무언중에 자세가 틀어져서 미묘한 음의 차이를 느낀다는 것이다.

바이올린도 피아노처럼 처음에는 반짝반짝 작은별 나비야 등 동요부터 배웠다. 그러면서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근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시각장애인 아이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대구광명학교 유치부에 입학했다. 집은 구미이고 대구광명학교는 대구 대명동에 있는데 집에서 가는 시간이 한 시간쯤 되었다. 어머니도 지선이를 위해서 뜨게 방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김지선 : “엄마는 저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제가 공부를 하는 동안 엄마는 학부모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유치원을 마치면 저를 집으로 데려와야 했습니다.”

독일공연 리허설. ⓒ이복남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학부모들은 학부모 대기실에서 자식자랑이나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다. 특수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기다려야 하므로 학부모를 위한 프로그램 같은 것을 운영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어느 특수교사에게 문의했더니 예전에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평생교육원 같은 것이 학교마다 다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학부모들이 수강을 한다고 했다.

김지선 : “대구광명학교 다닐 때는 매일 엄마가 따라다녔는데 서울로 옮겼을 때는 스쿨버스를 타고 혼자 다녔고, 엄마는 레슨 때만 같이 다녔습니다.”

구미에서 대구 대명동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가는 길이 한 시간쯤 걸려서 집에서 일찍 나온다고 해도 길이 막히는 등 지각을 하기 예사였다.

김지선 : “어릴 때 제 별명이 지각 대장이었어요. 유치원은 물론이고 초등학교도 걸핏하면 지각을 했거든요.”

광명학교 유치부에서 처음으로 점자를 배웠다.

김지선 : “점자를 가나다라 하고 붙여서 배운다면 그런대로 알 수가 있는데 기역니은 디귿 해서 한자씩 배우니까 잘 못한다고 선생에게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점자를 이렇게 따로 배우면 누구나 어렵다고 하는데 유치부 선생이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한 반 6~7명 정도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단다.

아무튼 그렇게 유치부 2년을 보내고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구미에서 한 시간이 걸리는 대구광명학교를 다녔고, 일주일에 두 번씩 두 시간은 음악학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홉 살 때 처음으로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개최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 출전했다.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 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는데 1등을 했다. 이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음악 콩쿠르에 나가기 시작했고, 나갈 때마다 입상했다.

김지선 : “아빠가 제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지선이의 입상작품을 홈페이지에 올리곤 했다.

김지선 : “음악 콩쿠르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지만 사촌언니가 백지영을 좋아해서 백지영 노래는 다 쳤습니다.”

그 밖에도 올챙이와 개구리, 소주 한 잔, 어머나, 사랑해도 될까요 등등을 즐겨 쳤다. 그런 노래들은 바이올린이 아니고 피아노로 쳤다.

공연으로 독일 여행. ⓒ이복남

그의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다. 지선이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절에 다녔다. 그의 부모님이 다니는 절은 구미 불로사였다. 불로사 주지 현오 스님은 부모님을 따라다니는 지선이를 눈여겨보다가 하루는 지선이가 불로사 한편에 있는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시고 지선이를 지도해 줄 선생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현오 스님이 찾아 낸 사람은 니르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강형진 단장이었다. 지선이는 강현진 단장을 만났다. 강 단장은 음악에 대한 지선이의 의지와 열정을 본 후 지선이의 지도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강형진 단장에게 바이올린 지도를 받으려면 구미에서는 어려우므로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김지선 : “광명학교에 정이 들었고, 이건 비밀이었지만 5학년에 좋아하는 오빠가 있어서 싫다고 했어요.”

서울로 가기 싫어서 미적미적하고 있던 차에 서울 어린이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라고 했다.

김지선 : “하는 수 없이 한빛맹학교에 상담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한빛맹학교에는 음악 하는 아이들이 아주 많았고 모두가 그에게 친절하고 다정했다.

김지선 : “엄마 나 학교 옮길래!”

3학년 2학기 때 한빛맹학교로 전학을 했다. 한빛맹학교는 강북구 수유동에 있었는데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은 마땅치 않아 중계동에 집을 하나 마련했다. 아버지는 직장이 구미에 있어서 지금도 구미에 계시고 그와 어머니만 중계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학교를 전학하고 보니 급우들은 좋은데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는 부모님이 불자였기에 강형진 단장에게 바이올린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절이나 불교방송에도 출연해서 연주를 했다.

김지선 : “한빛맹학교는 기독교학교인데, 불교방송에서 취재하는 것을 학교에서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만날 천국 이야기를 하는데 천국이 어디 있냐고 대들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강형진 단장에게 사사를 받았다. 강형진 단장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고 연습용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도 했다.

김지선 : “바이올린은 교습비도 비싼 줄 알고 있는데, 강형진 선생님은 교습비도 안 받고 거기다 연습용 바이올린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현재 그는 제법 비싼(3천만 원 정도)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했다고 한다.

이재혁 김민주 김지선 트리오 CD. ⓒ이복남

선화예술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에서 시험을 쳐 보라고 했다. 중1 때였는데 영재센터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김지선 : “그때 시험이 바흐의 파르티타 1번 1악장이었습니다.”

악보는 어떻게 볼까.

김지선 : “엄마가 점자 악보를 만들었습니다.”

김지선의 어머니 강영미(1964년생) 씨는 딸 지선이를 위해 점자를 배웠고 지선이의 음악을 위해서 기본 악보를 구입해서 점자 악보를 만들었다. 지선이가 니르바나 강형진 단장에게 바이올린을 배울 때 처음에는 강 단장의 연주를 MP3에 녹음했다. 지선이가 연습할 때 반복하며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선이는 강습 후에 집에 오자마자 바이올린을 몸에 붙이고 살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점자를 배워 점자 악보를 직접 찍으며 지선이의 선생 역할까지 해야 했다.

강영미 : “처음에는 제가 지선이에게 점자 악보를 찍어 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선이가 오타를 집어내는 거예요.”

지금은 점자 악보를 만드는 곳이 몇 군데 있어 어머니가 점자 악보를 직접 찍지는 않지만, 그 대신 지선이가 공연을 할 때면 바이올린을 가지고 따라가는 등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강영미 : “세상살이가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지선이에게는 보통 아이들보다는 시간과 노력이 두 세배는 더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지선 씨는 어머니가 우는 것이 너무 싫다고 했는데 딸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어머니 강영미 씨는 그래도 눈물이 글썽했다.

강영미 : “지선이가 싫어해서 안 울려고 하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는데 어쩌겠습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지선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김지선 : “수학을 좋아했는데 학교 공부도 힘들고 바이올린 연습도 힘들고 너무너무 힘들었고 24시간도 모자랐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불교방송이나 화계사 등 여기저기 절에 가서 연주를 했다.

중2 때 크리스마스였는데, 목동 제자교회에 가서 연주를 하라고 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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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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