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이 시는 양인자 시인의 ‘그 겨울의 찻집’인데 김희갑이 곡을 붙이고 조용필이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 그대로 이른 아침의 찻집은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바람 속으로 걸어가서 마른 꽃 걸린 창가에서 외로움을 마시는 사람, 싸한 외로움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배종덕씨. ⓒ이복남

“예전부터 ‘그 겨울의 찻집’을 좋아하고 즐겨 불렀습니다. 그래서 조용필의 사인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장애인이 되고 보니 그 노래가 더욱 더 가슴을 적시네요.”

조용필의 사인을 어떻게 받았을까.

“한 때 인터리어 공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무렵 조용필이 제가 일하던 극장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는 양인자 시인도 좋아하고 조용필의 노래도 좋아한다고 했는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사람이다.

배종덕(1951년생) 씨는 부산 서대신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했다. 구덕산 아래 판자촌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노가다를 했다. 아버지는 날이 맑으면 일을 했고 비가 오면 일을 공쳐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는 8남매의 셋째였는데 동생들이 아파서 죽고 굶어서 죽고 하나 둘 죽어 갔다.

“어머니는 어릴 때 일본에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랐는데 형제가 많은 것이 그렇게 부러웠답니다.”

해방과 함께 부산에 나와 아버지를 만났는데 제 먹은 것은 타고 난다는 신념으로 8남매를 낳았으나 가난 때문에 자식을 넷이나 잃었다.

“형 하나와 셋이나 되는 동생의 죽음도, 가난 때문에 죽었다는 어머니도 탄식도 가슴에 사무쳤습니다.”

배종덕씨의 고관절. ⓒ이복남

그런데 바로 아래 여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눈이 실명상태였다. 여동생은 한쪽 눈으로도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 여동생이 열아홉 살 때 장질부사를 앓았습니다.”

장질부사(腸窒扶斯)는 역병 내지 염병으로 불리던 장티푸스이다. 동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동생의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지자 그는 동생을 업고 동네 병원으로 갔다. 동생을 진료한 의사는 장티푸스라고 했다.

“동생이 제 손을 잡고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손이 불덩이 같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걱정 말라며 동생을 다시 집으로 업고 왔다.

“동생은 열이 펄펄 끓었는데 시원한 게 먹고 싶었든지 배를 하나 깎아 먹었답니다.”

그리고 동생은 눈을 감았다.

“동네 어른들이 장질부사에는 배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합디다.”

필자가 배종덕 씨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으나 배가 장티부스 또는 열병을 악화시킨다는 내용은 없었다.

“여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안 좋은지……. 모든 것이 돈이 없는 가난 때문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각인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몸서리를 쳤다. 자신은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으려면 식구가 많으면 안 되겠다고 싶어서 그는 장가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신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집에 먹을 게 없어서 국밥집에 보이로 일했습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 보니 밥은 굶지 않았지만 학교는 다니는 등 마는 등 했다. 어린 시절 보통의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데…….

“배가 고파 보세요. 우선은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신세 한탄하는 배종덕씨의 모습. ⓒ이복남

학교에서 그림은 잘 그렸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중학교도 야간으로 다니며 일을 했다. 당시엔 물이 귀했으므로 물을 길어다 주고 품삯을 받았다. 때로는 건축 공사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나이가 조금 들면서 전기공사 일을 했는데 열대엿 살부터 전봇대를 타기 시작했다.

야간공고를 다니며 전기공사를 하러 다녔기에 전기공사 자격증도 있었다. 그 무렵 영장이 나왔는데 병사 판정을 받았다.

“전봇대에서 떨어지면서 뇌혈관을 다쳤다 합디다.”

그 후 여동생이 죽자 다시는 집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친구와 서울로 가출을 했다. 가난에 대한 죄의식과 서러움은 오랫동안 그를 지배했다. 서울에서는 아현동 판자촌에 방을 하나 얻어 놓고 친구 셋이 자취를 했다. 요즘처럼 은행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돈이 생기면 장판 아래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특별히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그 돈을 몽땅 갖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친구 셋이 함께 자취를 했는데 한 친구가 돈을 갖고 도망을 가버려서 남은 친구와 함께 눈물을 훔치며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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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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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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