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혼자 벌어서 네 식구가 먹고 살아야 했기에 고등학교는 실업계로 갔다. 3학년 때 담임선생이 아는 치과에 견습간호원으로 취업을 시켜 주었는데 아버지를 닮았는지 성질이 대쪽 같아서 두 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졸업을 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나갔으나 소장이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또 그만두어야 했다. 아마도 우창희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으리라.

이해인수녀와 함께 왼쪽앞이 우창희씨.

당시 덕천동 시영아파트에 살았는데 이사를 가려고 집을 내 놓았다. 1981년 4월 13일. 아버지는 일하러 가시고 어머니도 볼일 보러 가시고 동생들은 다 학교에 가고 직장을 그만 둔지 며칠 되지 않아 혼자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집 보러 왔습니다.”

문을 열어 주었더니 키가 자그마한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이방 저방 둘러보더니 부엌으로 들어 갔다.

“찬장이 참 이쁘네요”

“네 아버지가 기술자라서 손수 짜신 거예요.”

그리고는 남자가 집을 구경하는 사이에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남자가 부엌칼을 들이 대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까 ‘돈을 내 놔라’고 했다. 돈이 없다고 하니까 ‘간이 큰 아가씨네’ 하면서 장롱을 뒤져서 엄마 한복을 찢어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을 뒤로 묶었다.

임종욱과 제주도여행.

이 당찬 아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에 물린 재갈을 이빨로 밀어내고 '돈이 없다. 돈이 있는가 찾아 봐라' 하면서 실랑이를 했다. 막내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인데 동생이 돌아 올 시간을 벌 속셈이었는데 1시가 넘었는데도 웬일인지 동생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칼을 목에 들이대며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제서야 너무나 무섭고 수치스러웠지만 칼이 들이대는 데야 어쩔 수가 없었다. 발가벗긴 채 손은 뒤로 묶어 작은 방에 몰아 놓고 여기저기를 뒤졌으나 돈이 없으니까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너무나 무서웠다. 어찌해야 하나. 그 순간 베란다가 보였다.

이해인수녀의 편지.

“잠깐만요. 저쪽 서랍 밑에 돈을 찾아 줄테니까 내 손을 앞으로 좀 묶어 주세요.”

남자는 그 말을 곧이들었는지 손을 앞으로 묶어 주었다. 남자를 서랍 밑으로 안내를 하고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린 순간이 10초도 안 걸렸을 거예요.”

그의 집은 4층이었는데 석유배달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4층에서 뭔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달려 와서 보고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불러 왔다. 그는 떨어지는 순간 정신을 잃었는데 아주머니는 발가벗은 아가씨를 보고는 놀라서 옷을 입히느라 이리저리 뒤척였다.

아주머니가 모포만 한 장 덮어서 병원에 바로 데려 갔어도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택시를 불러 근처 병원으로 데려가니 큰 병원으로 가라해서 백병원으로 갔다. 그날 밤 수술을 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쓰러질까봐 ‘그냥 좀 다쳤다’며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이해인수녀와 후원자 실비아

그 남자 즉 강도는 끝내 잡지 못했다. 그가 떨어진 화단에 사철나무가 있었는데 그 사철나무에 걸려서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밤에는 아버지가 밤을 새우고 낮에는 어머니가 병간호를 했다. 수술비는 여기저기 빚을 내고 아버지 월급에서 가불을 했다. 처음에는 하반신마비라고 했으나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는데 그 자리가 아픈 것 같았다. 의사가 정밀 진단을 하더니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모두가 아버지의 지극정성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병원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수술자리가 아물자 한 달 반 만에 퇴원을 했다.

“척추를 다쳤는데 한 달 반만에 퇴원한 사람은 저 밖에 없을거예요.”

아버지는 퇴근해 오시면 딸을 돌보았다. 발목 밑에 베개를 바치고 잠이 들어도 두 시간쯤 지나면 다리가 아파서 아버지를 깨우면 아버지는 딸의 다리를 폈다 구부렸다 운동을 시키고 다시 자리를 바꿔 주었다.

아버지는 딸 옆에 자면서 “아버지” 부르기만 하면 하루 밤에도 대여섯 번은 일어 나셨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동생들도 다 학교에 가고 나면 어머니가 휠체어에 앉혀 주었다.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그동안 성당에 잘 나가지 않았는데 다치고 나서부터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기도하고 편지 쓰고 뜨개질을 했는데 하루가 너무 짧았다. 우창희씨의 삶은 (3)편에 계속.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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