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장애 인물과 그의 열정적인 인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장애인물 톺아보기>. 이 코너 함께 해주실 분,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질문1 : 오늘 장애인물 톺아보기 두 번째 순서 인데요. 오늘 소개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답변 : 지난 시간은 소아마비로 장애을 입으신 분이셨는데요. 오늘은 시각장애를 가지셨던 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인데요. 강영우 박사님은 우리 장애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직함은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의 직함이 있었고, 그리고 미국 노스이스턴 일리로이 대학교 교수님이셨고,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등등 굵직굵직한 직함이 한참이나 더 있지만 여기까지만 소개를 하고요.

강영우 박사님 하면 또 하나 특별한 것이 있는데요.

부인 석은옥 여사님과의 관계가 마치 헬렌켈러와 설리반 선생님과 같은 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질문2 : 그렇군요. 그럼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로 알려진 강영우 박사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볼까요?

답변 : 강영우 박사님은 13살 때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는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하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해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축구공에 눈을 맞았다고 합니다. 물론, 많이 아프기는 했지만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어머니에게는 얘기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바느질로 밤을 새우곤 하셨는데 병원비 때문에 차마 눈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결국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 그만 시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곧 아들의 실명이란 사실을 의사로부터 듣고 8시간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불과 2년 사이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그리고 시력을 잃게 된 강영우 가족은 4남매가 남았는데요.

나이가 가장 많았던 누나가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역할을 해 왔는데요. 누나도 과로로 인해 세상을 떠나버리게 됩니다.

나이 어린 3남매 모두는 생계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여동생은 고아원에 보내지고요. 남동생은 남의 집 철물점으로 보내졌고 강영우 박사는 시각장애로 인해 고아원도 갈 수 없다보니 18살에 서울맹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로인해 서울맹학교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고 점자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다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국 1968년 연세대 교육과에 입학을 합니다.

시각장애로 공부가 쉽지 않았던 강영우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은 숙명여대를 다니면서 서울맹학교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석은옥이란 멘티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질문3 : 석은옥 멘티가 나중에 부인이 되는 거죠?

답변 : 그렇습니다. 정말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이고 영화와 같은 감동적인 사랑이 있었는데요. 아니, 실제로 드라마로도 나왔고 영화도 나왔는데 시간이 허락되면 뒤에서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이 석은옥 멘티를 만나게 된 것은 강영우 박사님이 18살에 서울 맹학교에 중등부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점자도 잘 모르고 공부할 참고서들도 많이 부족해서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때 공부를 가르쳐 주었던 자원봉사 대학생 누나였던 것입니다.

당시 석은옥 멘티는 숙명여대 영문과 1학년 학생으로 적십자 청년봉사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다른 대학생들을 데리고 서울맹학교로 와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부인이 된 석은옥 여사를 통해 들어본 이야기인데요. 자원봉사자로 1년을 만났고,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되어 강영우 박사님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질문4 : 자원봉사로 1년, 누나 동생으로 6년, 약혼녀로 3년의 스토리도 궁금한데요?

답변 : 자원봉사로의 1년의 기간중에는 주말이면 강영우 학생이 있는 맹학교 기숙사로 찾아가서 대부분 책을 읽어주었고요.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안내해 주는 일을 했는데, 하다 보니 정이 들어서 ‘동생’ 삼았다고 합니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으로만 부담 없이 강영우의 누나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요.

2년 정도 지나서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이미 누나 동생으로 자리메김 되었고 누나로서 동생이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고요.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그야말로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여대생 석은옥은 큰 기쁨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질문5 : 그렇게 누나 동생으로 6년을 보냈다고요?

답변 : 그러니까요. 누나 동생으로 6년, 부인 석은옥씨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석은옥씨가 강영우 박사를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대입을 준비하던 강영우는 그동안 그림자처럼 뒷바라지를 해 주었던 석은옥씨가 없어 불편함이 이를데가 없었지만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물론, 시각장애를 이유로 입학원서조차 내지 못하는 우여곡절도 겪지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합격을 하고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됩니다.

누나 석은옥씨는 미국으로 떠난지 15개월 만에 귀국했는데 그동안의 이별이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석은옥 여사님은 나중에 증언을 했는데요.

1968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2월 22일 26살이었던 강영우와 27살이었던 석은옥은 장래를 약속하고요. 그리고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도 하고요.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를 비롯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석은옥 나이 서른이 다 되어 1972년 2월 26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질문6 : 두 분 결혼을 하고 이후의 스토리는요?

답변 : 두 분은 결혼 후 바로 한국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미국으로 건너온지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을 합니다만 강영우 박사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강 박사님을 칭찬만 할 뿐 인재로 평가하고 교수로 임용해 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미국에서 구인활동을 해서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제로터리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강영우 박사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로터리클럽 회원이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학금으로 25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 왔습니다.

사실, 미국에서의 강 박사님의 활약은 더더욱 빛이 났는데요. 2001년에는 당시 미국 이민 100년 한인 역사상 최고위직이었던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발탁되었고요.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루즈벨트재단 고문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매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으로 상금 1천만원과 함께 장애인상을 주는 것이 있는데요. 이 상의 유례가 1996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제1회 루즈벨트 국제장애인상을 수상하고 상금받은 금액을 정립해서 지금까지 장애인상을 선정해서 표창하고 있는데요.

이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 상의 첫 수상국으로 대한민국이 선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강영우 박사님이 하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질문7 : 미국 대통령 정책차관보로 일을 하셨잖아요? 미국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백악관에 입성을 하게 된 건가요?

답변 :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고 2001년 2월 1일 백악관의 첫 손님으로 장애인계 대표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강영우 박사님과 부시 대통령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는데요.

강 박사님과의 대화가 부시 대통령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는 계기가 되어서 부시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은 고위 공직자 중 한 명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로 임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출현율은 10%, 등록율은 5%이지만 미국의 경우 장애출현율을 20%로 보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인구만큼이나 많은 장애인이 있는데요.

강영우 박사가 국가장애인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미국의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정책을 개발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게 주 임무였습니다.

강영우 박사가 만든 대표적인 법은 911 사태 이후에 만든 정책인데요. 911 사태로 인해 많은 장애인들이 희생되었는데 특히 높은 빌딩에서 휠체어로 계단을 내려올 수 없어 많은 목숨을 잃게되는 상황이 발생한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장애인을 구출하느냐란 정책을 미국이 도입했는데 강영우 박사님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니버설 디자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는데요. 가령 장애인들은 첨단기술 즉 휴대전화나 ATM 기기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요. 처음부터 회사가 이와 같은 제품을 개발할 때부터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동으로 쓸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에서도 강영우 박사님이 여러 역할을 하셨다고 합니다.

질문8 : 한국에서는 많은 활동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상당히 알려진 것은 강영우 박사님의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알려졌기 때문일까요?

답변 : 어쩌면 그러지 않았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강영우 박사님이 유학을 떠난지 6년만인 1987년에 귀국했을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언론들은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합니다.

하지만 칭찬만 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니까 다시 미국으로 건나가게 된 것인데 강영우 박사님 부부의 사랑 이야기는 그야말로 영화 스토리잖아요.

그래서 먼저 드라마로 선을 보이게 되는데요. 1994년 12월에 70분, 2부작 기획특집극으로 MBC를 통해 전파를 타게 됩니다. ‘

눈먼 새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강영우 박사님 역에 탈랜트 안재욱씨, 그리고 석은옥 여사역에는 탈렌트 김혜수씨가 나왔는데요. 물론 안재욱씨나 김혜수씨가 94년 당시 떠오르는 신인 스타였지만 캐스팅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화는 드라마로 선보인 그 다음 해인 1995년에 ‘빛은 내 가슴에’란 제목으로 개봉이 되는데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청춘스타 이세창씨와 김예지씨였습니다.

이 드라마나 영화로 나오기 전에 강영우 박사의 영문판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가 이미 7개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드라마와 영화로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질문9 : 영화는 좋은 반응을 받았을까요?

답변 :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울기도 하고 감동이 있었다라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좀 냉정했습니다.

너무 신파극처럼 구성되어 있다거나 영화의 경우는 다큐가 섞여 있기도 해서 감동을 반감시키기도 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계의 반응을 좀 살펴봤는데요. 역시나 장애계에서도 반응도 썰렁했습니다.

어쩌면 장애계의 반응이 더 냉담했었는데 저는 궁금해서 나름 취재를 해 보기도 했는데요.

장애인들은 모두가 강영우 박사처럼 어려움을 겪고 그 어려움을 견디어 가는 과정이나 결과들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강영우 박사는 박사학위를 따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하는 것이 장애를 극복했다거나 성공의 지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영우 박사의 영화가 감동을 주었다거나 내가 그 분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멘토를 삼아야겠다라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영화도 드라마도 당대의 최고의 청춘스타들을 캐스팅해서 만들었지만 관람객들로부터는 냉담한 반응을 얻은 것으로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질문10 : 강영우 박사님이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참으로 아름답게 이별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답변 : 네, 2011년 12월에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는데요. 가족이나 지인들은 수술을 권유했지만 강 박사님은 수술을 선택하시지 않고 가족과 함께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췌장암 판정 받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그 때 68세이셨는데 요즘 100세 시대로 주위에서는 너무 안타까와 했습니다.

특히, 강영우 박사님은 시한부 판정을 받으시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지인들에게 일일이 세상 하직 인사를 메일을 통해 보냈는데요.

그 인사에는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메시지였다고 메일을 받았던 지인들은 전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강영우 박사님은 장애에 대한 편견이 가장 극심했던 60년대, 70년대를 살아오시면서 시각장애인 최초 박사 취득이란 명함을 갖고도 본국에서 마땅한 대접도 받지 못했지만요.

꾸준히 세상의 많은 장애인들을 위한 어떤 일을 해 보시기 위해서 시도하셨고, 인문학적으로 가장 널리 우리에게 알려진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님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에 장애인물 톺아보기 시간을 통해 되짚어 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