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가을, 제임스 메리디스가 등교를 강행함으로써 미시시피 대학의 인종차별을 종식시킨 바로 그 시기, 전신마비 장애인인 에드 로버츠(Ed Roberts)는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다.

메리디스가 흑인의 고등교육 시대와 인권운동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처럼 로버츠는 장애인 인권운동을 열어가고 있었다.

1953년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츠는 14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학교 풋볼팀의 쿼터백이었던 로버츠가 이제는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발병 후 그는 휠체어에 앉을 수조차 없어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했다.

폐 근육마비로 혼자 호흡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360kg이나 되는 인공호흡장치(iron lung) 속에 들어가서 하루 18시간씩 보내야만 했다. 공중전화 부스 크기 만한 이 장치에 들어가서 그는 머리만 내놓은 채 누워있었다.

로버츠는 우울증과 무기력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무기력한 장애인”으로 생각했다. 부모들은 의사나 상담사의 말만 듣고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느 의사는 그의 부모에게 로버츠가 일찍 죽었더라면 오히려 더 인간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의사는 로버츠가 평생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20개월의 병원생활 끝에 그는 인공호흡장치도 함께 집으로 돌아 왔다. 학교에 갈 수 없었던 로버츠는 인공호흡장치 안에 누워서 전화로 수업을 들었다. 로버츠가 질문을 하면 그의 반 학생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 마이크를 돌려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발병하기 전 로버츠는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병으로 약해지지 않은 것은 그의 정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건강이 좋아지면서 그는 휠체어를 타고 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하였다.

로버츠가 복학하던 날은 대단했다. 그가 리프트를 타고 자동차에서 내리자 학생들은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 학교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놀라움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버츠는 “스타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한 장애인이 아니라 스타가 되기로 결심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로버츠의 성적은 우수했다. 그러나 관료주의에 사로잡힌 교장은 운전과목과 체육 점수가 부족하다며 로버츠에게 졸업장 수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전직 노동운동가였던 로버츠의 어머니는 거세게 항의하였다.

결국 그녀의 주장대로 재활과목으로 체육을 대신하고, 운전과목은 면제되어 로버츠는 결국 졸업장을 받았다. 로버츠는 장애인이 성장하는 동안 “부모들

이 장애인 자식을 위해 기꺼이 싸우거나, 그 싸움에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그 자식을 훌륭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장애인들이 육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거칠게 보일 때만이 그들이 뒤로 물러선다는 좋은 본보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버츠는 샌 마토우 대학에서 2년 동안 행복하게 보냈다. 그는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UCLA로 진학하려 하였다. UCLA는 2차 대전에 참여했다가 장애인이 된 퇴역군인을 위한 장애학생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있었다. 장애인의 한사람으로서 로버츠는 휠체어가 접근가능하고, 장애인인 자신을 받아주는 학교로 진학하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샌 마토우 대학의 지도교수인 진 워쓰 교수는 제약이 가장 적은 학교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눈높이를 최상으로 맞추라고 권유하였다. 그녀는 로버츠가 전공하고 싶어하는 정치학 분야에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UC버클리 대학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재활국은 경증 장애학생들에게 지급하는 교육비를 그에게는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로버츠는 일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 돈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샌 마토우 대학 학장과 워쓰 교수는 로버츠가 지방대학에서 성적이 우수했는데, 더 공부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면서 항의하였다.

이들의 주장도 묵살되자 샌 마토우 대학 직원들이 이 사건을 지방신문에 제보하여, 결국 주당국은 여론의 도마위에 놓였다. 로버츠는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언론은 비록 장애인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은 있지만,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장애인”의 편에 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주정부의 지원으로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 대학은 그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버클리 대학 총장은 “우리는 이전부터 장애인들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라고 로버츠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의 말이 맞았다. 교실은 접근 불가능했고, 도서관과 식당에는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로버츠는 샌 마토우에 다닐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와 함께 계단을 올라 교실에 들어감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버클리에는 장애인이 기거할 기숙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숙사 바닥이 362kg이나 되는 그의 인공호흡장치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 로버츠는 첫 번째 난관에서 멈추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마음씨 좋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기거할 곳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로버츠는 학생건강센터 소장인 헨리 브루인 박사를 만났다. 브루인 박사는 한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인공호흡장치와 함께 로버츠는 버클리 대학 부속 코웰병원 3층으로 갔다. 그곳에 1인실 기숙사를 만들어 기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은 로버츠가 생각한 대학생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쇄적인 캠퍼스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버클리 대학이 로버츠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한 지방신문은 “무기력한 장애인이 학교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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