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호국안보동지회’ 김 석 호 회장 (69세)

“요즘 군기피를 위해 몸에 문신을 하는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국가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는 거지요, 소수라고 믿습니다.”

지난 68년 월남의 핌람전투에서 입은 눈과 손, 척추 등의 부상으로 1급 상이용사 판정을 받은 후 소령으로 퇴역한 김석호씨.

그는 부상으로 인해 시력을 모두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지역의 어려운 상이군경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선행을 베풀고 있어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전투중 부상으로 인해 상이처가 무려 4군데가 되어 9년동안의 병상생활을 해내야 했던 김씨는 부상을 극복하고 서울에서 핸드백과 장갑을 수출하는 사업에 손을 댔다가 경험부족으로 퇴직금까지 모두 날리는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79년 화물 운송업체를 운영, 재기에 성공하고 87년도에 고향 김제 죽산면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충효전가(忠孝傳家)’를 대대로 가훈으로 삼고 살아온 안동김씨 백범 김구선생의 후손이라는 김씨는 선산을 구입해 선산밑에 제실 겸 살림집을 지어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다.

그는 유공자 자립사업으로 1500평규모의 명량산과수원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수익금으로 주변 장애인자녀나 상이군경자녀등에게 매월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급한 장학금이 70여차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주변의 추천을 받아 행하는 장학금 전달은 한번도 빠트리지 않는다”고 주변사람들은 그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주변의 칭찬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6.25가 터졌습니다. 학업을 중단할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교사들이 쌀을 모아 제 등록금을 내 주신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들께 그 때 받은 은혜를 이렇게나마 되 갚음하는 의미이지요.”

김씨는 이런 자선활동과 함께 김제시 호국안보동지회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한다. 지역의 후진들에게 호국, 안보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금조성도 착실히 해 나가고 있다는 김씨는 내년쯤에는 그에게 아픈 상처를 준 월남을 다녀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월남에서 상처뿐인 몸으로 돌아온지 벌써 올해로 35년째입니다. 그때 월남전때의 상황과 현재의 월남은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이 변해 있겠지요. 내년에는 꼭 가서 보고 안보교육 강연에 반영할 계획입니다.”

김씨의 눈에는 감회에 젖은 듯 눈물이 고였다.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6월이 오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는 김씨.

안보교육의 부재로 인해 군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는 그는 월남전 후 ‘보트피플’의 예를 들어 가며 나라없는 설움을 느껴보지 못한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우리처럼 분단국가는 준 전시상황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하는 김씨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젊음을 바친 우리 회원들을 볼 때 가슴 뭉클할 정도로 자랑스럽다”며 “현실적으로 많은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항상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몸은 장애가 되었어도 정신만은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6.25참전은 호국참전이고 월남전 참전은 국익참전” 이라는 설명을 부연하면서 그는 회원들에게 “국가 경제발전의 초석을 이뤘다는 자부심과 함께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좌절하지 말고 살아갈것”을 당부한다. “후진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꿋꿋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이 1시간의 안보교육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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