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스무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우진주 씨의 글이다.

무 제

우진주

중학교 재학 시절 갑작스러운 고열로 조퇴를 하게 되었다.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빠에게 데리러 와달라는 연락을 했고 이마가 뜨거워서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와중에 제발 후문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정문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뜨거운 얼굴이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빠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내 친구들은 우리 아빠를 무서워했다. 오른쪽 눈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 어린 아이들의 입장에선 신기하면서도 무서운 얼굴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선천적인 것은 아니었다. 배고픈 스무 살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겠다고 공사판에 가셨다가 눈을 다쳤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을 고칠 돈이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어서 차라리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지라는 바보 같은 생각에 치료시기를 놓쳤고 결국 후에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셨다. 살면서 크게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보진 못 했다. 배고픈 서러움을 두 딸에게 물려줄 수 없다며 365일 중 365일을 일하셨다. 나 역시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안 보이는 게 아니니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은 더욱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 입학 후 아빠는 보이지 않던 날개가 한순간에 꺾여버렸다.

어느 순간 짜증이 많아졌다. 갱년기가 온 건가? 왜 나한테 짜증이지? 식사 중 반찬을 집지 못하신다. 숟가락만 쓰기 시작하셨다. 하루는 바지 무릎이 찢어져 집에 오셨다. 그저 짜증만 내고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기에 그날도 그러려니 친구들과 밖에 나가 신나게 놀고 늦은 밤 돌아왔다. 거실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혼내려고 그런가 하고 괜히 눈치를 보며 집에 들어갔다.

머뭇거리는 입에서 나온 말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제 일을 할 수 없으며 수술 일정을 잡고 왔으니 함께 병원에 가달라는 말이었다. 최대한 참아보려 했고 자식들에게 폐가 될까 혼자 해보려고 하셨단다. 하지만 그게 참는다고 어떻게 해결될 일인가. 하나 남은 눈마저 앞을 못 볼 수 있다는 게.

수술 자체가 치료를 위해 하는 것이긴 하나 수술 후 못 보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여 우리는 준비가 필요했다. 선천적으로 앞을 못 보는 것과 후천적으로 못 보게 되는 것은 차이가 컸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못하게 되니 그 불안감이 얼마나 컸을까. 딸들을 걱정시킬까 말은 못 했지만 그 불안감이 계속해서 겉으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소리에 민감해지고 쓰지 않던 감각들은 날카로워지려 노력했다. 우리는 모든 물건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물건은 바로 치워버렸다. 식사 보조는 물론이거니와 옷을 입고 병원을 가는 거까지 모든 곳에 손길이 필요했다. 아기를 돌보는 것과 같았다. 머리가 크기 전엔 남들과 다른 아빠가 부끄러워 같이 밖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기가 된 아빠의 손을 잡고 병원을 가니 지난날들에 왜 더 감사하지 못했을까 후회만 가득했다.

믿는 종교도 없던 내가 이곳저곳을 향해 기도하고 무릎을 꿇으며 애타게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 전부터 초점이 없던 오른쪽 눈에 이제는 안대를 낀 왼쪽 눈까지 더해지니 아빠의 모습은 영락없는 장님이었다. 일주일 동안 아빠는 내 손을 놓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로 지내야 했다.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며 방에만 들어앉아 식사도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만 하셨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아빠는 늘 방에서 텔레비전과 함께였는데 이제는 늘 들리던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그냥 포기하셨는지 적막이 가득한 방안에 오롯이 혼자 그 아픔을 감당하셨다. 아빠는 항상 괜찮다고만 하셨기에 정말 괜찮은 줄만 알았다. 날 업고 공원을 몇 바퀴씩 돌던 그 넓은 어깨가 그토록 작아질 때까지 나는 무얼 했을까. 난 두 눈이 다 멀쩡한데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아빠의 젓가락질이 서툴러지는 걸 봤으면서도 못 본 척했었다. 뒤늦은 후회를 감당할 것이 없어 그저 아빠 옆에 붙어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보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인고의 일주일이 지나고 내 기도가 하늘에 조금이라도 닿았던 것인지 완전 실명은 아니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한 쪽 밖에 없는 눈이지만 조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아빠는 여전히 나의 손길이 필요한 상태고 서툰 젓가락질을 숨기려 애써 숟가락만 사용하시지만 그래도 좋다. 이제는 아빠의 상태를 알고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의 아버지는 6급 시각 장애인이다. 어쩌면 몇 년 안에 다시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완전한 시각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는 내가 부끄러워할까 봐 밖에 나갈 땐 선글라스를 끼고 괜히 멋을 부린 것처럼 행동하신다. 아빠의 불안감이 미안함으로 바뀌는 것이 내게는 더 큰 미안함인지도 모르신다. 이제는 내가 보는 세상이 더 크고 아빠의 눈 안에 갇힌 세상보다 내가 아빠에게 보여줄 세상이 더 넓다. 나의 두 눈은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으니 아빠의 보이지 않는 눈이 되어 남은 인생에 작은 행복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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